작년 여름, 말복을 일주일 쯤 남겨둔 이 시점, 거의 딱 일 년 전의 일인 것 같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이기도 하니. 할머니는 학교의 문턱도 못 가보신 분이셨지만 하시는 말씀에서는 언제나 기품과 총명함이 느껴졌었다. 물론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내가 집을 떠나와 나의 독자적인 생활을 시작하기 전 30년 동안을 한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아왔으므로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난리를 두 번씩이나 겪으신 격동의 한 세기를 살아오신 할머니는 당연히 남달리 특별하고도 힘든 경험들을 많이 겪으셨으리라. 그만큼 우리들에게, 특히 집안의 가장 나이 어린 나에게 마치 꾸며내기라도 한 것 같은 믿기지 않은 실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독립만세를 외칠 때 마을 이장은 회관 앞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다 같이 만세를 부르자고 했다고 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태극기가 없어서 항상 속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던 손바닥만 한 명주 헝겊 조각을 꺼내 들었다고 하셨다. 또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이던가. 그때 만해도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은 꼭 반공교육을 했었다. 당장 3학년인 우리 큰 아이만 해도 6·25전쟁이 어떤 전쟁인지 알리도 없고 또 요즘 학교에서도 따로 그런 교육을 하고 있지도 않으니 30년이라는 기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른 것들로 바꿔 놓았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나는 그 시절, 6·25전쟁 피난이라는 주제를 두고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서 대상을 받았었다. 할머니를 졸라 듣던 그 피난이야기, 마을 창고로 대피해서 밤새도록 어둠과 폭탄 소리의 두려움에 떨었던 이야기, 총포탄이 어떻게 집 마당으로 쏟아졌는지 이야기, 동산에만 숨어 있던 빨갱이가 북으로 도망을 가면서 우리 집에 불을 지르고 간 이야기 등 나는 할머니의 그 옛날이야기들을 들은 대로 전교생이 모인 대 강당에서 큰 소리로 발표했고 교장선생님께서 어린 학생이 어떻게 그렇게 전쟁이야기를 생생하게 잘 알고 있는지 기특하다며 나를 불끈 들어 안아 올려주셨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할머니가 어린 나에게 해 주셨던 그 많은 전쟁이야기들이 정말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모든 게 다 사실이고 할머니가 경험했던 겪어왔었던 일이라는 것을 빨갱이가 도망가던 날 불을 지르고 갔다던 그 불길의 흔적이 우리 집 마루 기둥끝자락이 여전히 까맣게 타다 만 채로 있는 것을 늘 가까이 만져보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 날의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발표할 수가 있었는지 모른다.
사실, 이렇게 장황하게 할머니와의 옛 추억을 이야기 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집 텃밭에서 기르던 수탉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모처럼 손주들이 왔으니 닭을 잡아서 삶아 주시겠다며 아버지는 모가지가 비틀린 수탉을 펄펄 끓는 물에 풍덩 담갔다가 꺼내면서 지하수 샘을 파 놓은 마당한쪽에서 닭털을 뽑아내고 계셨고 할머니와 나는 그 모습이 징그럽고 차마 생생하게 털 뽑힌 닭을 직접 보고는 그 고기는 한 점도 먹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단풍나무가 있는 냇가 옆 그늘진 평상으로 가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 그런데 아빠는 왜 암탉을 안 잡고 수탉을 잡았어?”
“저 수탉은 제 구실을 못했어. 본래 수탉은 제 암탉을 얼마나 챙기는지 모이도 주면 저는 뒷짐 지고 물러나 있다가 암탉들이 다 먹고 나야 제가 가서 모이를 먹고 또 새벽 4시만 되어도 어김없이 울어대는 통에 선잠이 깼었는데 어찌된 게 저 수탉은 모이를 줘도 저만 먹고 새벽에 울지도 못하고 암탉이 낳은 달걀로 병아리도 못 까고 그러잖아. 그래서 좀 불쌍해도 자꾸 등치만 커지고 해서......”
사실 그날 저녁 큰 녀석이 오리 다리 크기만 한 커다란 닭다리를 들고 물어뜯는 것을 보고 할머니와 아버지는 웃으면서 할 말씀을 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내장 손질을 하다 보니 수탉의 고환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닭은 선천적으로 겉모습만 장 닭이었지 제 구실도 못하게 생겨먹었다고, 그래서 암탉을 돌보지도 새벽에 울지도 못하고 그렇게 그냥 바보같이 먹고 자고지내면서 제 몸집만 커진 것이라고. 나는 설마 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제시한 명백한 증거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멍청한 사람을 두고 ‘닭대가리’라고 비하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멍청한 사람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어쨌든, 작년 여름 저녁 날 큰 아이는 가엾은 수탉의 큼지막한 닭다리로 토실토실하게 살을 찌웠고 작은 녀석들도 기름지게 배를 불렸다. 아무튼 그 바보 같은 수탉은 내 아이들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고 내게는 매우 신기한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이야깃거리를 남겨주었고 떠났다. 그 후, 우리 집엔 그 녀석보다 영리하고 날쌘 또 다른 수탉 녀석이 들어와서 암탉들을 품고 보살피면서 지금까지도 아주 잘 살고 있다.
해가 산 뒤로 떨어지자마자 하늘에 불이 붙었다. 하기야 불이 붙지 않고서야 도저히 그냥 넘어갈 해의 화염이 아니었다. 새벽 5시경부터 타오르기 시작한 불은 온 종일 땅위의 모든 것을 티끌만한 불씨라도 있으면 순식간에 확 태워버릴 정도로 바짝 말려 놨다. 땅위에서는 지열이 아지랭이 피아오르 듯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나뭇잎이 우거진 키 큰 나무에 매달린 매미들은 제 각자 울음소리를 만들어 허공에서 충돌시켜 고막을 성가시게 하고 말라버린 땅위에 난 잡초들조차 강인한 생명력은 이제 옛말이라는 듯 이파리들을 떨구고 낮게 가라앉아 땅과 거의 맞닿아 있었다. 풀숲을 걸어도 발목에 생채기를 내던 잡초들도 더 이상 성가신 존재가 못되었다. 고개를 들고는 단 한 숨도 들이 쉴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대기였다. 그러던 것이 하늘에 불을 지르고 나서야 산 뒤로 도망가 버렸다. 구름은 벌겋게 불타올라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고 다 타고 난 구름은 하늘 언저리 곳곳에 회색빛 재만을 남겨 둔 채로 그렇게 차츰 차츰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런 날의 반복이 거의 한 달, 가을의 시작이라는 입추가 찾아왔다. 아이에게 입추를 설명해 주면서 여름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가을이 오고 있다고 소식을 알렸으니 '이제 머지않아 이 무더위도 점점 식어버릴 것이다.'고 말해 주었다. 왜 엄마는 에어컨을 계속 켜지 않느냐고 불만을 품은 아이에게 사람은 이런 더위도 겪어봐야 하는 것이라면서 절절 끓는 거실에 해를 등지고 앉아서 보란 듯 책을 펴고 등줄기로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마치 목표를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과도 같은 희열이라고 느끼면서 그 모습을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더위는 곧 지나간다고 다시 한 번 말해 주었다. 삼복더위의 말복이 남아 있으니 곰 솥에 닭을 삶아내도 조금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아주 잠깐 세 녀석이 각자의 손으로 큼직한 닭다리를 물어뜯는 모습만 상상해도 마음이 흐뭇해지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이마의 땀이 식은 듯하다.
엄마의 자식에 대한 애정은 그 어떤 논리로도 반박이 안 되며 최고의 달변가라도 따질 수 없는 매우 예외적인 애정이며, 그것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어머니인 여성과는 뗄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특히, 어린 자식에 대한 애정이란 결코 이기주의가 아니다. 계절이 오고가는 것과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과 비슷하다. 나에게 닥친 이 운명을 나 스스로는 결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은 몰랐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울수록 힘든 상황이 겹쳐 올수록 더 침묵으로써 견뎌 내리라고 생각해 왔다. 차라리 이 시기가 일 년 중의 가장 무더운 여름이라서 오히려 더 다행이다 싶었다. 시시때때로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은 땀을 핑계로 돌려 말할 수 있었으니까.
반복적으로 실수하지만 또 다음번의 후회에서는 지난번의 후회보다 덜 크게 후회하기를 조금 덜 잘못했다고 반성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조금씩 내가 원하는 뜻으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진정으로 노력하는 정신으로 내 에너지의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오직 살아나는 길은 노력하면서 맛보는 기쁨이 생명의 원천으로 알고 그렇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기를 나는 지금도 반복하고 있지만 한 번씩 무더운 밤공기가 내가 밀어 열어 재처 창문이 열리는 속도보다 더 빨리 내 안으로 밀려들어올 때 정신이 혼미해지기는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숨을 고르며 침묵하고자 하였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누가 그 별 빛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말로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감정을 왜곡시킬 뿐이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또 경험해 보지 않았었던가. 온화하고 말수가 적은 언행이란 여인으로서, 어머니로서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장식품임을 마음속에 새기고 항상 염려 할 것이리라.
밤하늘의 달을 보려거든 우물 안을 들여다보지 말고 직접 하늘을 올려다보라고 하였다.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며 피하지 않는 당당함과 용기를 언제나 마음속에 굳게 새기리라. 하루가 끝나는 밤이 되었을 때 오늘 하루도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고생해서 일을 하였더라도 아무런 기쁨도 행복도 맛보지 못할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정확하게 일주일 전 오늘, 나는 눈이 붉게 충혈되고 벌에 쏘인 것같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밤새 울었었다. 괜찮다고 뭐 이쯤이야 하는 허영심으로 고개를 쳐들지 않고 달을 보겠다고 웅덩이만 찾아다녔던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내일 더 많이 울게 될지 아니면 앞으로는 그 날 밤같이 울지 않게 될지는 모르지만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다. 현재 나는 내 아이들에게 등불이 되어 줘야 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며 또한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뿐이니까. 단, 하루라도 허송세월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분명해질수록 삶의 고단함도 별것이 아닌 것이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아, 그리고 번듯하고 각이 잘 잡힌 그 건물의 통유리 문을 밀고 모퉁이를 돌아 나오면서 어쩌면 혼인의 서약이나, 출생의 증명 등 이 모든 서류들의 절차란 것은 단지 이제 더는 그 결혼이 무효이며 한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인 하찮은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와 함께 즐겁게 보았던 영화 -[니모를 찾아서]- 의 아빠 니모의 이야기는 사실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을 진짜로 꾸며 낸 허위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는가. 영화 속 ‘니모’, 실제로는 희동가리 혹은 클라운피쉬라고 불리는 이 물고기는 엄마 물고기가 죽게 되면 수컷이 암컷으로 성전환을 하여서 엄마 물고기로서 제 새끼를 키운다는 사실을.
모자란 사람을 ‘닭대가리’, 못생긴 사람을 ‘물고기’에 빗대어 놀리는 사람들은 정말로 무엇을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한번 물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