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이 큰 아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난 별 다른 뜻도 없이 이렇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었다.
“엄마는 이미 경찰관이 됐잖아!”
“그럼 정우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은데?”
아이의 꿈은 나이가 변하면서 점점 다른 쪽으로 변해갔다. 아이가 경찰관이 되지 않겠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건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고 막 3학년이 되었을 때였다. 아이의 기초생활조사서를 작성하다가 장래희망 란을 보고 내 마음대로 ‘경찰관’이라고 쓰려던 것을 ‘정우야! 장래희망에 경찰관이라고 적는다?’고 하던 말에 아주 강력하게 부인하면서 ‘아니야, 엄마!’하고 말하던 바로 그때였었다. 나는 작성하고 있던 가정통신문을 내려놓고 정말로 궁금한 마음에 아이에게 제대로 갖춘 문장으로 질문을 했었다.
“정우야! 여태까지는 경찰관이 꿈이었잖아. 그래, 꿈이란 건 늘 변하기 마련이야. 그래서 지금은 뭐가 되고 싶은데?” 정말로 궁금했다.
아이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님!”
일전에 작은 아이 받아쓰기 숙제를 돌봐달라고 큰 아이에 부탁을 했을 때 나처럼 조급하게 아이를 윽박지르지도 않고 아주 차분히 예를 들어가면서 설명해 주는 큰 아이의 모습을 칭찬한 적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가르치는 일처럼 어렵고 힘든 일도 없는데 정우는 엄마보다 훨씬 더 그 일을 잘하는 것 같다.’고.
그러자, 아이는 그러면 ‘선생님은 훌륭한 사람이겠네?’ 하고 말을 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선생님이 없다면 아마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훌륭한 과학자나 발명가와 같은 사람들은 없을지도 몰라.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주는 일은 정말로 어렵고도 힘든 일이란다. 그런데 그 대상이 너희와 같이 어린 아이라면 훨씬 더 그럴 수도 있어.’ 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정우의 꿈이 경찰관에서 선생님으로 변하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엄마의 말이 어느 정도 아이의 꿈의 방향을 변하도록 했을 거라 짐작하고 정우의 장래희망 란에 다른 글씨들 보다 힘을 주어 ‘선생님’하고 명조체에 가깝게 꾹 꾹 눌러 썼다.
나는 출근을 하지 않거나 퇴근을 한 뒤 모든 일들을 끝내고도 내 시간이 남아 있다면 아이 공부상이든 막 먹고 치운 밥상이든지 가리지 않고 책을 펴 놓고 앉아서 읽는다.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으니 마땅히 시간을 보낼만한 일도 없을뿐더러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요전 날, 내게 ‘엄마는 이다음에 무엇이 되고 싶나’ 하던 큰 아이의 질문이 문득 생각났다. 사실 내게는 안정적인 직업이 있고 건강하고 착하고 영리하며 잘 생기기까지 한 세 아이가 있으니 이다음에 내가 또 뭐가 될지 물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는데 큰 아이는 내 꿈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암시적으로 내게 그런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정우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생각의 깊이가 있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때 아이의 질문에 그냥 막연하게 웃으면서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는데 아이는 내게 ‘엄마는 그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거야!’라고 단언하듯 말했었다. 그래서 나는 어째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를 묻자 아이는 그냥 가볍게 이 말 한 마디를 하고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면서 동생들과의 놀이에 참여했었다.
“엄마는 언제나 공부하고 노력하잖아!”
내가 아이에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정말로 언제나 노력하고 진지하게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을까 반성을 하게 되었고 그저 나머지 시간에 독서를 하는 것에 나만의 ‘소일거리’, 혹은 ‘시간 죽이기’ 식으로 치부해 버리면서 가끔씩 내비친 내 꿈에 대해서는 허염심으로 가득 찬 이루지 못할 꿈이라며 진심으로 간절하게 바라기나 했었는가 싶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한 번은 책을 보는 내게 작은 아이가 ‘엄마는 왜 책을 읽고 노트에 글씨를 쓰는 거야?’ 하고 묻는 것을 두고 마침 온 집중으로 아주 오랜만에 막 공감이 되는 글귀를 읽고 있던 순간이었던 지라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답해 줄 의지도 없이 ‘선우야, 그냥 너도 심심하면 세밀화 책이라도 꺼내서 그림이라도 봐.’하고 대충 대답한 적이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 엄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존중받는 아이로, 엄마의 말씀을 잘 들어서 예쁨 받는 아이로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그 순간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아이는 책장에서 양장본으로 된 백과사전 크기의 동물 세밀화 한 권을 꺼내고 내 옆에 앉아서 무거운 책장을 열었다. 말 그대로 세세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동물들을 설명하는 깨알같이 써진 글씨를 아직 한글이 많이 서툰 아이는 내게 읽어 주기를 계속 요구했고 나는 말 그대로 나만의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어서 아이의 요구가 성가시게만 느껴졌다. 마침 아이가 가장 즐겨 보는 ‘상어 편’이 펼쳐져 있었고 내 눈에 입을 크게 벌리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리고 있는 거대한 백상아리의 세밀화가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선우야, 그러지 말고 상어의 이빨이 모두 몇 개인지 세어보는 게 어때? 숫자를 정확하게 셀 줄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한 거야!”
그런데 정말로 선우는 상어의 이빨을 세기 시작했다. 크게 그려진 세밀화의 경우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페이지 중간 중간마다 실제 상어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몇 겹으로 나 있는 상어의 이빨을 세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하면서 또는 속으로 세는 것인지 입술만 움직이면서 상어의 이빨을 잘도 세어 나갔다. 그러기를 한참, 드디어 선우가 입을 열고 질문을 해 왔다.
“엄마! 이 상어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이빨을 세?”
나는 그만 아까부터 참고 있었던 웃음을 더는 숨기지 못하고 보고 있던 책장을 덮어 버리면서 그냥 크게 웃어버렸다. 아이의 순진한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정말로 입을 꽉 다물고 있는 상어의 이빨은 누구라도 세지 못했을 것이니까.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이와 함께 상어의 그림과 사진들을 보면서 같이 징그러워하고 같이 놀라워하고 같이 무서워해 주었다. 나는 할 것이 없어 나를 귀찮게 하는 아이에게 소일거리라도 시키는 셈 치고 상어의 이빨을 세도록 한 것인데 아이는 이 말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여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성실하게 엄마의 말을 수행하는 아이의 반짝거리는 눈빛과 높은 콧날과 선명한 입술 모양에 두 손을 모두 들고 그만 항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다음에 무엇이 될까. 내가 또 다른 무엇이 될 수 있기는 할까. 이렇게 하루하루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내가 무엇이 될 것이라고 꿈을 꿀 수는 있을까? 그래도 무엇인가를 이루겠다고 노력하며 산다고 살아온 것 같기는 한데 막상 뒤를 돌아보니 무엇을 노력하고 산 것인지 아니면 꿈은 차치하더라도 그냥 헛된 만족감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남들이 나를 두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정작 나는 힘든지 모르고 살고 있는데 그렇게 사는 것은 힘든 것도 아니라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 들의 말 한마디에 흔들려서 내가 처한 상황보다 몇 배는 더 힘들다고 부풀려 착각하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면 할수록, 나와 가까운 가족들의 뜻이나 그들의 감정에 만족이 되는가를 먼저 떠올리게 되면서 나의 괴로움들은 실제보다 더 커져갔다. 내가 ‘잘 살고 있지 못하는 구나!’ 자책감도 한 몫 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내 아이들에게는 절대로 너희 자신을 남들과 비교하면서 살지 말기를 그렇게 가르치겠다고.
나의 유일한 친 자매이자 나의 벗, 내가 어릴 때부터 계속 사랑해 온 언니한테만은 나의 모든 이야기를 다 말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고 온 날 밤, 그가 불쌍했다는 내 감정만큼은 말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동정도 사랑의 감정도 아닌 단지 지나 온 시간에 대한 저축이며 재산과도 같으며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도덕적인 도리와도 비슷한 것이었고 내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지만 그 감정은 결국 나만의 비밀이자 마지막 은신처이며 피난처와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큼은 누구한테라도 간섭받거나 침해받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한밤중에는 연민이었다가 한 낮에는 증오로 바뀌어버리고 마는 또 어느 순간에는 아무 감정조차 못 느끼는 무관심으로 돌변해버리는 매우 잘 삐치고 변덕스러운 응석받이 아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생떼를 부리면서 나의 혼을 쏙 빼 놓는 막내의 행동이 왠지 나로 인한 감정의 전이 탓인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 집안의 암적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정말로 괴롭다가도 또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금방 러닝과 팬티만 입은 차림으로 피아노에 올라 앉아 통통한 장딴지를 까불거리며 생긋 우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 또 다시 마음이 풀어지기도 한다. 그러기를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하면서 지나간다. 그러나 언제나 하루의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감정은 원망과 미움과 억울함이었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원망과 미움의 감정도 모두 다가 내 안의 들어 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감정을 좌우하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니까. 이제는 그 대상을 해소하고 초월해 보고자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전보다 몇 배로 더 많은 육체적인 노동을 하고 또 일을 만들어 내어서 하고 그래도 시간이 남게 될까 두려워 또 다시 일부러 책을 꺼냈다.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시간은 무심히 지나가기 마련이니까. 사실 지금 나는 장차 무엇이 되고자 하는 꿈도 의지도 희박해졌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나를 지켜보는 그 어떤 존재가 ‘저 인간은 소일거리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버리고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냥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비하고 있다. 그냥 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