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가 코 앞인 삼춘기 초딩의 영혼 체인지 SF 어드벤처
#4. ♬ 손을 잡고 빙빙 돌아라 ♬
탈을 사서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열심히 청소하고 계신다.
"뭐야 탈을 기어이 샀어? 그거 둘 데도 없는데 뭐하러 샀어"
"어 나는 회사일 급하게 처리할게 있어서 얼른 회사에 다녀올께”
뭔가 엄마에게 혼날 일이 생기면 아빠는 바람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게 아마도 아빠 엄마의 금슬 비결인 것 같다.
"어휴 니네 아빠는 왜 꼭 상의도 안하구 네가 사달라는 건 다 사주는거 야...나만 나쁜 역할이지 맨날!!!"
역시 우리 엄마는 ‘화’가 많아서 박혜‘화’다. 이럴 땐 빨리 내 방에 들어가서 책을 읽어야한다. 이렇게 엄마가 저기압일 때 게임까지하면 날벼락이 떨어지기 때문에 숙제든 책이든 뭐든 빨리 책상에 앉아야 한다. 엄마는 다시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하셨다.
우리집엔 청소기가 4대나 있다. 무선 청소기, 작은 무선 청소기, 물걸레 청소기, 로봇 청소기, 밀대 청소기 등 아 5대구나. 아빠는 걸레도 돈 주고 사는 사람은 처음 봤다면서 엄마를 놀렸다. 엄마는 깔끔 대마왕이다. 엄마가 제일 싫어하는 건 바로 슬라임. 지난번에는 천 쇼파에 슬라임이 묻었다면서 고래고래 화를 내셨다. 아니 나는 기억이 안나는데 슬라임에 발이 달렸는지 코딱지도 아닌게 왜 쇼파에 묻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2년전 쇼파 아래쪽에 붙여놓은 내 코딱지는 다행히 아직도 그대로 붙어있다)
“해리봉! 빨리 샤워해”
“땀 안 났어”
“땀 안 났어도 저녁에는 씻어야지. 손톱 밑도 까맣고 목에도 때 있잖아. 똥꼬도 싹싹 씻구! 겨드랑이도!”
아 진짜 안 씻어도 되는데... 땀은 진즉 말랐고 내 똥꼬는 깨끗한데... 엄마는 우리나라가 물 부족 국가까지는 아니지만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풍부하지 않은, 물 스트레스 국가라는 것도 모르나? 왜 자꾸 물낭비를 하는 거지? 옷도 그렇다. 나는 똑같은 옷을 이틀씩 입고 싶은데 엄마는 땀 냄새 난다며 옷을 세탁기에 넣어버린다. 킁킁~ 땀 냄새 하나도 안 나는구만. 엄마 코는 인간이 맡을 수 있는 냄새보다 만 배 정도 더 예민한 걸 보니 아마도 개코인가보다. 대충 샤워기로 물 묻히고 나와서 수건으로 슥슥 닦고 있는데 엄마가 또 잔소리다.
"해리야 로션도 발라. 다리가 거칠거칠해"
난 바위처럼 거칠거칠한 내 다리가 좋은데. 까칠까칠한 느낌이 사포 같아서 문지르면 얼마나 재미있는데 엄마는 나한테 자꾸 베이비로션을 바르라고 한다. 난 베이비가 아닌데!!
사실 얼마 전까지 내 꿈은 자연인이었다. 담양에 사시는 외할아버지가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을 좋아하시는데 같이 보다가 나도 자연인에게 매력을 느꼈다. 내가 좋아하는 곤충과 동물들과 함께 하는 자연 친화적인 삶! 결정적으로, 씻지 않아도 되고 로션도 안 발라도 되고 숙제도 안 해도 되고, 풀벌레 소리 들으며 빈둥 빈둥 실컷 멍 때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삶! 가만히 보니까 자연인 중엔 안경 쓴 사람이 없네? 나도 오늘부터 안경을 안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 대충 찌푸리면 대충 보이니까 사는데 대충 큰 불편이 없다. 안경 진짜 너무 불편했어. 자연인으로 안경 없이 편하게 살아야지.
“근데 해리야 너 그거 알아? 자연인 되면 밤에 숲속에서 혼자 자야해, 잘 수 있겠어?”
“어...어? 진짜? 왜 혼자 자? 엄마는? 아빠는?”
“자연인이 무슨 엄마 아빠랑 사니? 자연인은 다 혼자 살고 혼자 자야해~ 지금부터 혼자 자는 연습도 해야겠네~~”
그날 바로 자연인 꿈을 접었다. 서울 한 복판의 아파트에 살면서도 밤에 무서워서 혼자 못 자는데 깜깜한 시골에서 혼자 자야한다니, 어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스모 선수에 이어 자연인 꿈도 안녕이다.
소름 돋은 피부 위 물기를 대충 닦고 책을 조금 읽다보니까 슬슬 잠이 온다. 참, 각시탈을 사놓고 꺼내보지도 못했네. 한번 써볼까?
각시탈을 쇼핑백에서 꺼냈는데 뭔가 잠깐 빛이 보였다. 이상하다? 각시탈 안쪽에 조명이 달렸나? 안쪽에 분명 아무 것도 없는데... 안쪽을 확인하고 각시탈을 썼다. 각시탈의 눈 부분에 아주 작게 구멍이 나있는데 써보니까 생각보다 밖이 꽤 잘 보인다. 각시탈을 쓰고 엄마를 놀라게 하려고 거실로 나갔다. 살금 살금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 엄마의 등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엄마의 옷을 잡는 순간...... 이상한 정전기가 나면서 잠깐 1초? 2초? 정전이 된 것처럼 앞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손에 윙 소리가 나는 청소기 손잡이가 있었다.
#5. ♬ 바람의 멜로디 ♬
이게 뭐지? 내 손에 왜 청소기가 있지? 나는 태어나서 한번도 청소기를 돌려본 적이 없는데! 그러고보니 다리 밑이 허전하다. 왜 원피스를 입고 있지???? 손을 한번 보고 다리를 보고 그리고 거실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는데... 거기에 엄마가 서있다. 얼굴을 만져보는데 미끌 미끌하다. 머리카락이 길다. 이게 뭐지? 유리창에 왜 엄마 모습이 비치는 거지? 얼굴을 왼쪽으로 돌리는데 거기에 각시탈을 쓴 내가 서있다. 내가 나를 바라본다? 뭐지? 내 영혼이 빠져 나온건가? 그렇다면 저 각시탈을 쓴 내 몸에는.... 설마 엄마의 영혼이??
"해리야!!!!! 아악 이게 뭐야 뭐야 내가 꿈꾸는건가???"
내가 거울로 보던 나의 얼굴이 나에게 해리라고 부른다.
"어...엄마 나도 잘 모르겠지만 내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내가 된 거 같아. 아니 이.. 이상한데.. 내 영혼이 엄마 몸에 들어오고 내 몸에 엄마 영혼이 들어간 거 같아"
"뭐라구???? 이 각시탈은 뭐야 대체"
엄마가 각시탈을 벗어던졌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이 각시탈을 벗었다. 내가 내 몸에서 빠져나와서 나를 바라보니까... 나 왜 옷을 저렇게 입고있니? 집에서 입는 늘어난 반바지는 허리에 걸쳐서 엉덩이가 반쯤 보인다.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위아래로 뻗쳐있다. 볼과 배는 왜 저렇게 빵빵하지? 근데 이 와중에도 나 좀 동글동글 귀엽다.
"엄마...나도 잘 모르겠는데 내가 각시탈을 쓰고 청소기 돌리는 엄마 등 뒤로 가서 엄마를 잡았거든.. 근데 그때 스파크 같은 게 막 파바박 튀면서 이렇게 되어버렸어!! 뭔가 각시탈 때문인 거 아닐까?"
"뭐야 이게!!! 꿈이면 빨리 깨야지. 나 좀 누울테니까 너도 얼른 이리 와서 옆에 누워! 다시 손 잡으면 바뀔 지도 몰라"
아니.. 누운다고 뭔가 달라질 거 같진 않은데 이런 비상 상황에도 우리 엄마는 참 긍정적이고 단순하다. 그렇게 엄마와 나는 안방 침대에 나란히 손을 잡고 누웠다.
"헤이 카카오!! 10분 타이머 맞춰줘!"
째깍 째깍... 아무런 변화도 없다. 나는 메니큐어 칠해진 엄마의 손으로 오동통하고 귀여운 해리의 손을 잡고 천장을 바라봤다. 진지하게 이 상황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가 빠져나온 봉해리의 몸이 방구를 뿡!!! 뀐다.
"아 정말 해리봉! 팬티 찢어지겠다!!"
"엄마... 근데 지금 엄마가 내 몸에 있는 거거든? 엄마가 뀐 거 아니야?"
"아니야!! 엄마가 언제 방구 뀌는 거 봤어? 해리야 니 몸에 가스가 많이 차 있나봐.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는데 갑자기 방구가 왜 나오니 대체"
내 몸이 방구를 뀌었는데 엄마가 안뀌었다니... 정말 아이러니다. 아까 점심 때 인사동에서 돈가스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돈가스 먹기 전에 수프도 먹고 아빠 치즈 돈가스 두 조각도 내가 먹고 디저트로 버블 밀크티까지 마셨지. 가스가 나올 만 하다. 1일1똥을 실천하는 내 몸은 이 와중에도 참 정직하다.
“딩딩딩~ 10분 타이머가 종료되었습니다”
음성 인식 스피커 헤이 카카오가 울렸다. 10분 동안 침대에서 가만히 손 잡고 누워있다가 일어났는데 아무 것도 변한 게 없다. 나는 여전히 긴 머리에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몸에 있고 엄마도 여전히 귀여운 내 몸 안에 있다.
“해리야, 일단 각시탈은 잘 갖고 있어. 거기에 뭔가 해결책이 있을 거 같아. 같이 인사동에 가서 그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자. 탈을 판 할아버지면 다시 돌려놓는 방법도 알고 있을 거야”
“근데 엄마 내가 뒤돌아봤을 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안 보이더라구. 다시 가면 계실까?”
“엥? 갑자기 어떻게 없어지겠어. 잘못 봤겠지. 어서 옷 갈아입어”
나는 분명히 그 할아버지가 팔던 좌판이 없어졌다고 얘기했는데... 엄마가 내 말을 안 믿어서 우리는 할 수 없이 인사동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인사동 쌈지길 옆 골목. 내 예상대로 아무 것도 없다.
“진짜 여기가 맞아??”
노란 티셔츠에 초록색 휠라 반바지를 입은 내가 말한다. 나는 엄마가 골라 준대로 네이비색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검정색 구두를 신었다. 지하철에서 다리 벌리고 앉았다가 혼났다. 평소의 나대로 지하철에서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또 혼났다.
“봉해리, 다리 오므리고 얌전히 좀 있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
남들은 생각보다 우리한테 관심이 없는데.. 엄마는 참 사람들 눈치를 많이 본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데 발이 불편하다. 잘못 디뎠다가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엄마는 왜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불편한 신발을 신고 불편하게 남의 시선을 살피면서 살까?
“정말 여기에서 각시탈을 산 게 맞아? 아빠한테 전화해볼까?”
“응 여기 맞아. 여기에서 할아버지가 탈을 팔았는데 내가 각시탈을 골랐어”
“아이... 근데 왜 없어진거야. 이제 어떻게 해...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큰 일이네”
“엄마... 출근한다고??? 그럼 나 엄마 회사 가야해??? 엄마는 내 학교에 가고??? 오 마이 갓”
“진짜 오 마이 갓이다 정말.. 난 몰라”
인사동 한복판에서 나와 엄마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지 말든지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내 몸에, 나는 엄마 몸 안에...이제부터 어떻게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