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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바라 Jul 29. 2019

<해리봉의 영혼탈출>#2. 방탄 뷔 형도 한복을 입는다

사춘기가 코 앞인 삼춘기 초딩의 영혼 체인지 SF 어드벤처

#2. ♬ 미운 얼굴 고운 얼굴 탈 하나에 가려두고 탈춤놀이 하여보자 ♬



   다음 시간은 국악이다. 우리 학교에서 문화체험으로 배우고 있는 수업인데, 배우면 배울수록 국악이 좋다. 장구나 북을 칠 때면 학원 숙제로 받은 스트레스가 덩더쿵 소리와 함께 다 날아간다. 덩더꿍 덩기덩기 소리에 내 가슴도 두근 두근 뛴다. 맥박도 왠지 빨라진다. 7살 때 집에서 냄비를 엎어 놓고 국자로 신나게 연주하다가 아랫집 아줌마가 올라온 적이 있는데 신나게 두드리면서 날린 내 스트레스가 아랫집으로 내려간 모양이다. 다행히 국악을 배우는 음악실은 1층이다.


   국악 선생님이 보여주신 영상 자료를 보니 옛날 사람들이 각양각색의 탈을 쓰고 기다란 흰 천을 흔들며 꽹과리 소리에 맞춰 신명나게 춤을 춘다. 뭔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가만히 탈을 들여다보니 다양한 표정을 하고 있는 탈들이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너도 한번 날 써봐. 재미있는 일들이 기다리고 있어'


   양반탈, 하회탈, 초랭이탈, 각시탈... 그러고보니 각시탈은 꼭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모험>에 나오는 가오나시와 닮았다. 자신의 목소리는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만 말할 수 있는 가여운 가오나시.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하게 짓고있는 표정이 가오나시와 꼭 닮았다. 


   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가지 기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 같다. 원래 많이 웃다보면 눈물도 찔끔 나오고, 복받치게 울다보면 헛웃음도 나오는 거니까. 좋으면서도 싫고 화를 내면서도 웃는, 오묘한 기분. 마치 요즘 내 기분과도 같다. 하루에 꼭 기분이 하나일 순 없잖아? 1분 안에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요동 치는 내 기분. 꼭 지금 날씨 같다. 초여름에 국지성 호우가 내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 떼는 하늘. 사람들의 기분도 기후 위기가 닥친 지구처럼 오락 가락해서 지금 저 사람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그럴 땐 차라리 가면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각시탈을 쓰면 서로 표정 살피느라 눈치 보지 않아도 될텐데. 저절로 마음의 거리두기가 실현되지 않을까?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 탈을 쓰면 ‘아 저 사람은 지금 마음의 거리두기를 하는구나’ 하고 다른 사람들이 쉽게 알아챌 수 있을텐데. 내 마음을 감추고 싶을 때 각시탈을 쓰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읽지 못하게 내 기분을 가리고 싶다. 잠깐 좋았다가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을 때 민망하지 않도록. 



#3. ♬ 오후만 있던 일요일 ♬



   드디어 기다리던 일요일, 아빠와 지하철을 타고 인사동으로 출발했다. 5호선 종로3가역에서 내려서 5번 출구로 나와 낙원상가 쪽으로 가다보면 좌판에서 여러 가지를 파는 사람들이 보인다. 작은 인체 모형에 점들이 많이 찍혀있는데 그 아래에는 각종 신비의 약들이 즐비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픈 곳을 모두 낫게 하는 만병통치약이라는데 여기가 얼른 TV 프로그램 <골목식당>이나 <수요미식회>에 나온 식당들처럼 대박나서 아픈 사람들이 다 나았으면 좋겠다.


   일요일의 인사동은 올 때마다 기분이 좋다. 외국인도 많고 내가 좋아하는 한복 입은 사람들도 종종 보인다. 한복은 정말 편하다. 엄마는 내가 체중이 48kg까지 늘면서 (키는...141cm이다. 흠흠) 허리가 편한 옷만 입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엄마도 겪어봤나?) 뜨끔했다. 사실 한복 바지를 입으면 정말 안 입은 것처럼 편하다. 엄마는 소아과 의사 선생님 얘기를 하면서 소아비만이 될 수 있으니 살을 빼야한다고 잔소리 하신다. 그치만 나는 폭신 폭신한 내 뱃살이 참 좋다. 손으로 쥐거나 두드리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가끔 노래를 듣다가 배를 두드리면 북소리도 나고 아주 요긴하다. (배꼽 있는 부분이 앞북, 엉덩이 쪽을 두드리면 뒷북이다. 혼자 앞북 뒷북 치면서 논다) 그리고 엄마도 늘 다이어트에 실패하면서 나한테만 그러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데! 흥! 


   지난번에는 한복 입고 거리 마술 공연을 구경하다가 마술사가 불러서 일일 도우미도 했다. 혼자 버클로 팔을 묶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다시 탈출 하는 마술인데, 그 아저씨는 낑낑대며 두 팔을 묶더니, “거기 한복 입은 친구, 나한테 물 좀 가져다줄래?” 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2리터 삼다수 생수통을 가져다줬다. 물론 팔이 묶여있어서 마술사 입까지 물통을 가까이 대줬다. 사람들이 박수를 쳐줬다. 한복을 입으니까 사람들 관심도 한번에 받고...역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손목에는 나무 팔찌, 목에는 조개 목걸이, 지난 가을 추석 즈음에 인사동에서 구입한 연두색 생활 한복까지, 오늘 신경 좀 썼다. 정말 나같은 패션 피플, 패피가 어디있을까. 어디서보니까 방탄소년단 뷔형도 생활 한복을 즐겨입던데, 나처럼 입고 인사동 활보하는 초등학생은 아무도 없을 거다. 난 남들과 다르다구!


우리반 여자애들도 좋아하는 방탄소년단 뷔도 생활한복을 즐겨입는다. 나는 우리반의 한복소년단이다!


   천천히 인사동 길을 구경하며 걷다보니 길에서 거북이 등딱지 같이 생긴 신기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보인다. 솥뚜껑 두 개를 붙여놓은 것처럼 생겼는데 오르골 소리가 난다. '행드럼'이라고 손안내판에 써있다. 은은하고 아련한 행드럼 연주를 들으니 인사동 골목길이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다이애건 앨리' 같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영롱한 행드럼 소리가 거북이의 숨소리처럼 드릉 드릉 거린다. 저기 쌈지길 골목 끝 쪽에 희미하게 탈을 파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마치 <생활의 달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전문가의 포스가 풍긴다. 하얀 수염과 회색과 흰색이 섞인 머리에 짙은 회색 개량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는 리어카에 여러가지 탈을 진열해 놓고 또다른 탈을 만들고 계신다.


"해리야 어떤 탈 살거니?"


   언제나 내 편인 우리 아빠. 아빠는 내가 원하는 건 거의 98 퍼센트 다 들어 준다. 내가 7살 때 옥토넛 만화를 좋아해서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고 했을 때도 비싸고 큰 해수 어항을 사주셨다. 엄마는 상의 한 마디 안했다고 잔소리 하셨지만 아빠는 못 들은 척 하셨다. 그 어항에서 리본 장어, 블루탱, 니모, 카우피쉬, 가든일 등등 해수어들을 키웠다. 사실 해수어를 키우는 건 쉽지 않다. 소금을 물에 타서 염도를 맞추는 일, 물 갈이, 어항 청소 등등은 아빠가 거의 다 해주셨다. 


   내 첫 해수어가 생각난다. 카우피쉬라고 복어의 일종인데, 봉카우라고 이름도 지어줬다. 초록색 카우봉은 우리집에서 3일도 못 살고 죽어서 정말 충격을 많이 받았다. 건강하게 헤엄치던 카우가 밥도 안 먹고 자꾸 물 위로 동동 떠오를 때, "봉카우 죽지마!!!" 하면서 엉엉 울었다. 아파트 앞 화단에 카우를 묻어 줄때 아빠가 신해철 아저씨의 <날아라 병아리> 노래를 틀어줬다. ‘굿바이 카~우, 이젠 아픔 없는 곳에서 하늘을 날고 있을까’ 내 물고기들 지금은 하늘 바다를 날고 있겠지? 


카우피쉬는 복어의 사촌이다. 입술이 아주 매력적인 물고기다.



"해리야 무슨 생각해? 아빠 말 듣고있지? 탈 골라봐 여기 하회탈도 있고 각시탈, 양반탈, 음.. 이건 무슨 탈이지?"


"아빠 나 이 각시탈 살래"


각시탈을 직접 보니까 가오나시와 꼭 닮았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까 각시탈이 날 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잘못 봤나? 


"이 탈 얼마에요?"


   탈을 만들고있는 할아버지가 아빠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다시 탈을 내려다본다. 


"안 판다"


   난 이 탈이 꼭 갖고 싶은데.. 왜 안 파신다는 거지? 안 통할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 <슈렉>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을 하고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이 탈은 주인이 따로 있어. 사람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탈이 주인을 선택 할거다"


   물건이 어떻게 주인을 선택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선택은 고른다는 건데, 물건에게도 손이 있나? 각시탈에는 손이 안 달렸는데?


"어.. 아마 각시탈이 저를 좋아할 거에요... 제... 제 방구 소리가 정말 특별 하거든요!!"


   아... 너무 갖고싶은 나머지... 학교 반 대표 선거에 나가서도 안하던 말을 자신있게 내뱉어버렸다. 우리 반 친구들은 내가 방구를 뀔 때 엄청 웃는다. 웃긴 행동을 할 때마다 친구들이 ‘봉해리는 정말 재미있어’라고 인정해준다. 내 방구 소리를 들으면 각시탈도 아마 나를 선택해주겠지? 가오나시 닮은 각시탈.. 뭔가 비밀스러운 사연을 간직한 것 같은 신비로운 각시탈. 저 안에 신나는 모험이 가득할 것 같다. 꼭 갖고싶다. 방구 말고 내가 잘하는 게 뭐더라....


"녀석...근데 넌 왜 이 탈이 갖고 싶은거냐?”


   이건 무슨 <프로듀스 101>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면접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할아버지와 각시탈을 번갈아 빤히 쳐다보다가 왜 이 탈을 갖고싶은지 다시 생각해봤다.


"음... 제 한복과 팔찌와 목걸이와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자신 있게 내뱉었지만 살짝 긴장이 된다. 할아버지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신다. 내 팔찌를 보던 할아버지의 눈빛이 반짝였다.


"흠 . . . 저 팔찌는......? 팔찌가 네 거냐?"

"아... 네! 할머니가 제게 주셨어요. 이 팔찌를 하면 마음이 든든해져요!"

"흠...... 그렇군... 이제 때가 되었군.. 네가 바로 예언의 아이구나. 자, 각시 탈은 네 것이다 가져가라"


   때? 예언의 아이? 내가 해리포터라는 건가? 물론 내 이름은 해리랑 같지만, 내 이마에는 흉터가 없는데…? 물론 내 이름은 해리랑 같지만, 내 이마에는 흉터가 없는데…? 부모님이 다음의 <호그와트> 카페에서 활동하다 만나서 내 이름을 해리라고 지었다는데.. 혹시 헷갈리시나?  나의 어떤 점이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할아버지의 기준을 통과한 모양이다. 휴 한번만 더 물어봤으면 인사동 한복판에서 나의 필살기인 개신남 댄스를 보여드릴 뻔 했다. 참고로 엉덩이를 흔들면서 뒤로 걷는 게 개신남 댄스다. 


   각시탈을 가져오려고 손을 뻗는 순간, 할아버지가 한번 더 내 손목의 팔찌를 확인하고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신다.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한번 잃었다가 해가 한번 더 떠오르기 전에 다시 되찾을 게다. 걱정마라.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나에게 소중한 카멜레온 '푸르니'와 비어드 드래곤 '스팟', 육지 거북 '부기'까지 파충류 친구들은 우리 집 거실에 잘 있을텐데... 내 지갑은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놨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게 뭐지?


   아빠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할아버지께 5만4천원을 드렸다. 지난번 왔을 때 다른 가게에서는 하회탈을 15만원이라고 해서 엄마가 비싸다고 안 사주셨는데 오늘 싼값에 완전 득템했다. 각시탈을 들고 너무 기뻐서 뛰다가 넘어질 뻔 했다. 넘어져서 혹시라도 각시탈이 깨졌으면 돈 아깝다고 다시는 안 사주셨을텐데 다행이다. 뒤돌아보니 골목 끝에 계시던 인사동 할아버지가 안 보인다. 그새 어디로 가셨지? 화장실이 급하셨나? 걸음이 무척 빠르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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