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가 코 앞인 삼춘기 초딩의 영혼 체인지 SF 어드벤처
내 이름은 박혜화. 아버지는 은혜 ‘혜’, 빛날 ‘화’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런데 출생신고를 하러 간 할아버지는 깜빡 하고 가장 흔한 한자인 꽃 ‘화’로 등록하셨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우리 아이들은 “엄마는 화를 잘 내서 이름이 박혜, ‘화’야?”라고 묻는다. 어쩌다 빛나는 꽃 같은 내가, 불 같은 화를 내뿜는 엄마가 되었을까?
이 이야기의 시작은 각시탈이다. 11살의 민규가 인사동에서 사달라고 한 각시탈. 고무신을 신고 생활 한복을 입고 놀이터에 나가는 것까지는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런데 각시탈까지 쓰는 건 엄마로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다. 아무래도 남들의 이목을 심하게 끄는 일이니까. 보통 다른 남자 아이들은 엄마가 입혀주는대로 평범하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데 왜 우리 아들만 고무신 신고 한복 차림에 각시탈을 쓰고 놀이터에 나갈까.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 아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민규에게 직접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셋 중 하나다.
1. 글쎄?
2. 몰라?
3. 그럴걸?
세 가지의 단답식 답을 아무리 꿰어 맞춰도 이해할 수 없던 아들의 세계가 각시탈을 직접 써보니 보이기 시작했다. 각시탈을 쓰고 각시탈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이 필터를 입힌 듯 다르게 보였다. 거실도, 베란다도, 주방도, 민규 방도 늘 보던 곳이 아니었다. 각시탈을 쓰면 시야가 좁혀졌지만 같은 곳도 빛이 굴절 되면서 달라보였다.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듯 새로운 세상이 보였다. 영혼체인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카메라의 시점이었다. 진짜 영혼이 바뀌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민규가 이래서 각시탈을 좋아하는구나.
각시탈을 벗고, 이제부턴 아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직접 해보겠다고 결심했다. 탈을 한번 써보는 것으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면 이게 가장 손쉬운 소통이 아닐까?
이 글은 민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2019년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미완성이다. 덕분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코로나 19 전후로 달라진 일상도 담을 수 있었다.
나의 첫 번째 독자인 민규가 응원하지 않았다면 메모장에만 남아있었을 <초등 각시탈>, 평범한 워킹맘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통과 이해의 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용기를 내본다.
빛날 화, 꽃 화에서 불 화를 거쳐 화목할 화, 온화할 화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