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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 Jul 05. 2024

물에 젖은 옷을 입은 시간들

참을 수 없이 우울한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자고 일어날 때부터 몸이 다르다. 잠을 자는 동안에 몸에 힘을 주고 있었는지 목과 어깨에 통증이 느껴진다. 어깨를 주무르고 목을 좌우로 여러 번 돌리다가 다시 눕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공부할 때는 한없이 가벼웠던 엉덩이가 이럴 때면 무거워진다. 멍하니 앉아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한다. 아침마다 내면에서는 열띤 토론을 펼친다. 주제는 매번 비슷하다. ‘나 자신이 하찮고 한심한가?‘ 안타까운 건 이 토론에는 사회자가 없다는 거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만,이라고 외치며 생각을 끊어낸다. 일어난 지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힘이 든다.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도 백수의 하루는 길고도 험난하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데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냉장고에 넣어둔 생크림 빵, 어제 못 본 드라마, 다정한 아빠의 부름도 소용이 없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와도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고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는 날에는 작은 주문을 건다. ‘지나갈 거야. 이런 날도 있는 거야.’ 이 방구석에서 나를 꺼내 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아무래도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는 나뿐인 것 같다.


주문을 걸었는데도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 날엔 적극적인 행동 처방이 필요하다. 어디서 보고 들은 게 많으니 뭐라도 해본다. 오늘 선택한 건 만세 요법. 두 팔을 크게 벌려 만세 자세를 취하면 긍정적인 호르몬(?)이 나온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나는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상큼하게 기지개를 켜며 잠을 떨쳐내 본다. 하아암. 눈치 없는 하품이 기어코 새어나온다. 정말 큰일이다.


힘겹게 일어나 식탁으로 향한다. 실컷 잤는데도 눈꺼풀이 무겁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며 도파민 루틴을 가동시킨다. 전두엽에게 무한 사과를 건네며 트위터와 유튜브를 반복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스크롤을 내리는 엄지손가락은 멈출 생각이 없다. 무심코 들어간 SNS에서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한 친구들을 본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언제부터 내 시간이 멈춰 있던 걸까. 조급해진 마음에 투두리스트 어플을 켠다. 또 지키지 못할 약속을 반복한다.


우울은 수용성이라고 하니 몸을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한다. 몸이 축 처지는 날에는 나를 위한 소소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바디스크럽으로 몸을 씻어내거나 반신욕을 한다. 찬물로 한참을 씻다 보면 잠들어 있던 감각이 하나둘 깨어난다. 문득 내 삶의 가치에 대해 생각한다. 삶, 인생, 가치와 같은 무게감 있는 단어를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하루를 통째로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보통 씻다 보면 마음이 가벼워지는데 오늘은 아닌가 보다. 진지해지고 싶지 않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렇게 구슬픈 댄스곡이 있었던가.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눈에 샴푸가 들어갔다고 하기엔 얼굴에 거품기가 하나 없다.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에 거짓말을 한다. ‘진짜 괜찮아. 사는 게 힘들긴 한데 재밌는 날이 더 많아. 성장하는 과정인 거야.’ 눈물을 꾹 참고 씻다가 거울에 비친 나를 보고 엉엉 운다. 나도 잘 살고 싶어서 그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도 잊지 않는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조금 머쓱해지기도 한다. 코를 훌쩍거리며 머리카락을 말리고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펼친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계를 바라본다. 아직 오후 두 시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일단 커피를 사러 나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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