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치민일상
사람의 마음이란 참 이상하다.
한 달 전만 해도 베트남에서는 백신을 절대 안 맞을 거라고 다짐을 했다. 하지만 한국에 가지 못 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주위에 백신을 맞은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니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백신 종류가 어떻게 됐든 얼른 맞고서 격리 없이 한국에 다녀오고 싶을 뿐.
이런 불안한 마음이 별 것도 아닌 일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호치민 시내 락다운으로 매일 같이 운동하던 친한 친구를 꽤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안부를 물었는데 친구가 나랑 헤어지고서 바로 백신을 맞으러 간다고 했다. 호치민에서 산업공단이나 국제학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백신을 맞는다고 했을 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현재 일을 하지 않고 있고 심지어 백신 접종 신청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물으니, 남자 친구의 삼촌이 공장을 운영하시는데 그곳 직원인 것처럼 등록해서 백신을 맞는다고 한다. 백신도 아스트라 제네카가 아닌 모더나로. 꼬박꼬박 세금을 성실히 내고 있는 나도 아직 백신은 감감무소식인데 나와 같은 외국인 신분인 친구가 어둠의 경로로 먼저 백신을 맞으니 옹졸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정부의 백신 접수는 다 허울뿐이고 인맥이 있는 사람만 백신을 다 맞은 후에, 나 같은 사람은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백신을 맞을 수 있는 걸까. 부정적인 기운이 나를 감싸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맥도 능력이니 능력을 더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베트남은 사회주의지만..)
백신 접종 어둠의 경로에 대해 알게 되니 2년 전 호치민에서 중국 비자 신청했을 때가 생각났다. 광저우 전시회 참가를 위해 비자 발급 신청하러 중국 대사관에 간 적 있다. 항상 사람이 많다고 해서 대사관 오픈 시간은 오전 9시인데 대사관 입장 줄을 서기 위해 새벽 6시부터 집을 출발했다. 분명 새벽같이 출발했는데 중국 대사관은 벌써 문전성시였다.
오전 9시가 지나고 10시, 11시가 되어도 줄이 줄어들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아무리 일처리가 느려도 어떻게 몇 시간 동안 한 발자국을 움직일 수 없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던 중 어떤 베트남 아저씨가 내 앞에 있는 서양인에게 몇 백 불을 주면 맨 앞으로 보내준다고 했다. 서양인은 단칼에 거절하며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순진하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비자 신청을 못 하고 있는 거라고 일침도 날렸다. 이 사람은 바로 전날에도 비자 발급받으러 왔다가 실패하고 다시 왔다고 했다. 아.. 뒷돈 준 사람들이 줄을 안 서고 들어가는 바람에 새벽부터 줄 선 사람들은 건물 앞쪽으로도 못 가고 있던 거구나. 대사관 맞은편에서 나를 기다려주던 인사팀 직원이 나만큼이나 화가 나서 그냥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새벽부터 일어났건만 대사관 건물 앞쪽도 못 간 것이다. 나처럼 일 때문에 중국을 가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라고 이런 식으로 운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사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비자 문제로 출장을 못 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참다못한 인사팀이 대사관에 들어갈 수 있는 어둠의 경로를 알아왔다. 돈을 얼마나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번처럼 새벽같이 일어나지 않아도 됐고 중국 대사관 오픈 시간에 맞춰 갔다. 대사관에 들어가기 전 브로커를 만났던 순간은 마치 범죄 영화의 한 장면 같았고 접선 장소는 대사관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였다. 브로커가 서류 다발을 줬는데 서류에 적힌 중국 호텔 이름이며 직업 등의 정보가 아무렇게나 적혀 있었다. 내가 실제 정보가 다르다고 하자 상관없다고 했다. 브로커는 나에게 미션을 줬다. 서류를 가지고 대사관 입구로 무작정 걸어가되 줄 서 있는 사람들과 눈을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했다. 입구에는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한 명 있을 텐데 서류를 보여주며 '포토 카피, 포토 카피'를 외치면 나를 바로 들여보내 줄 거라고 했다. 줄 서 있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범법을 저질러야 해서 손에 땀이 나고 긴장이 됐다. 일이 아닌 이상 베트남에서는 절대로 중국에 갈 일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주어진 미션대로 줄 서 있는 사람들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사관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줄 서 있을 때 나같이 어둠의 경로로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을 알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를 찾아가서 포토 카피를 외쳤다. 이 아저씨가 나쁜 사람들과 손잡고 돈 받고서 사람들 새치기시켜주고 있었구나. 아저씨는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약 1분 뒤 나를 대사관에 들여보내 줬다. 줄을 서지 않고 들어온 나를 보고 어떤 베트남 남자는 다른 사람들이 다 들리게 '베트남은 영원이 발전하지 못할 거라고' 큰소리로 한탄했다. '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라고 마음속으로 혼자 변명을 하며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길 빌었다. 대사관 안으로 들어오는 건 이렇게나 어려운데 막상 들어오니 비자 신청 서류 작성하고 제출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몇 분 되지 않았다. 고작 이 몇 분을 위해 하루는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 밖에서 줄을 서고, 하루는 범죄 영화를 능가하는 미션을 수행하다니. 허무감이 밀려왔다.
이 사건 이후로 코로나가 터져 다시 중국 대사관에 갈 일이 없었다. 그날 내 앞에 있던 서양인은 결국 중국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을까? 베트남에 살다 보면 편리함 때문에 이런 부조리에 쉽게 동조하게 되고, 가끔 가해자가 되어 같잖은 특권의식을 느낄 때가 있다. 살면서 부조리를 만나게 되면 중국 대사관 앞에서 어둠의 경로를 대차게 거절했던 그때 그 서양인을 떠올려야지.
Photo by Hakan Nural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