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에 큰 공원이 하나 있는데 나무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몇 줌이나 될까 하는 흙바닥에 뿌리를 내렸지만 그 위를 덮은 건 반듯하게 조각난 돌조각들이다.
그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 때문에 돌길은 울퉁불퉁한가 하면 깨지다시피 조각난 타일들도 있다.
돌길은 파도처럼 굽이치고 평지와는 다소 거리가 먼 위태로운 지형을 펼쳐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꼿꼿이 팔을 뻗어 싱그러운 초록잎을 맺는다.
뿌리를 내린다는 건 뭘까, 보금자리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똬리를 트는 건 어떨까.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사람은 거진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집을 떠나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고 했다.
그 사람은 거의 60킬로 가까이 들어가는 배낭을 메고 다녔는데 그 모습은 흡사 어깨에 집을 매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호기심에 물어보았고 그 대답으로 그가 늘어놓은 다채로운 경험담은 갖은 경이로움과 신비를 담고 있었고,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한두 시간을 훌쩍 넘겼다.
하지만 그가 맺은 결론은 이제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느꼈으니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달팽이처럼 가는 곳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며 자신만의 집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집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살았던 그 공간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나와 집 사이에 맺어진 끈끈한 정신적 유대감은 이따금씩 엄청난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그 공간을 둘러싼 모든 감각들을 선명히 그릴 수 있게끔 해준다.
그렇기에 내가 생활하는 행동반경에 포함된 공기 입자들까지도 집을 이루는 한 요소일 수도 있다.
난 아직도 때때로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살았던 집을 생각한다.
나무판자로 된 계단을 오르면 문 앞에 다다르고 그 앞에 놓인 발매트에는 필기체로 웰컴이라고 쓰여 있었다.
뻑뻑한 열쇠를 꽂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반을 돌리면 묵직한 느낌과 함께 문이 열렸는데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냄새는 갓 돌린 빨래에서 나는 섬유유연제의 향, 가끔씩 엄마가 해주던 팬케이크 시럽의 향, 혹은 카펫에서 은은하게 올라오는 탈취제의 향.
단순한 후각의 잔상들보다도 여기저기 부유하는 감각의 조각들을 맞추면 하나의 집이 완성되고, 그 안에 그 시간 속의 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집에 있어도 집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가끔씩 침대에 누워있어도 쉬고 싶고, 잠을 자도 꿈을 꾸고 싶은 모순적인 게으름이 들 때가 있는데 그것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든 생생하게 남은 기억의 조각들이 모인 집약체가 집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내가 현재 집 안에 있든, 집으로 가는 길이건, 집과 삼만리 떨어져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집의 한가운데 등을 대고 있더라도 더없이 이방인의 낯섦에 젖어들 수 있고, 등본의 주소지와 어마어마하게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더라도 그보다도 더한 익숙함을 느낄 수 있다.
작년 리스본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느꼈던 그 묘한 기시감을 기억한다.
거리에 떠다니는 공기 입자마저도 무겁게 내리 앉았던 그 날 새벽,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도 잔을 쥔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심리적 맵핑이 중요하다더라, 네가 거주하는 곳 주변에 너만의 장소를 만들어서 애정을 주어라, 그러면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내용을 담은 어떤 학자의 칼럼을 읽었다.
그래서 무작정 걸어 다녔다, 지하철이나 트램으로 20분 걸리는 거리를 한 시간씩 혹은 그 이상도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기꺼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집 앞의 공원, 오르내리는 사이마다 뻗쳐나가는 돌길의 균열을 관찰했다.
그대로 지나치는 법 없이 언제나 홀린 듯 들어가게 되는 길 건너편 몰 안에 있는 케이크 가게. 시나몬 향이 은은하게 덧그려진 애플 시나몬 케이크 맛이 일품이다.
동네 코인 세탁방에서 한 번의 세탁은 3유로고 건조기는 2유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번은 스페인에서 와서 첫 학기를 시작한다는 학생의 닫히지 않는 세탁기를 두어 번 주먹으로 두드려 열어주었다.
마트 진열대의 어디쯤에 파스타 소스가 있고 여러 종류의 잼이 있는지, 냉장 보관되는 물건들 중 어느 쪽이 크림치즈고 어느 쪽에 버터가 놓여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풍경 속에 내가 녹아들 무렵, 나의 마음은 이 곳에 서서히 뿌리를 내렸다.
한동안 형체 없는 외로움에 짓눌려 작게 신음했다.
무엇 때문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도 못한 채로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어 가끔은 천장의 노란 등만 멀건히 쳐다보고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럴수록 더, 두 팔과 두 다리를 있는 힘껏 뻗어내 뿌리를 내리려고 용썼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집은 스스로 쟁취해냈다고 할 수 있다.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마음의 평화와 오롯한 자립이 집 앞에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고, 예기치 못한 방문에 적잖이 당황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 그들 또한 내 집에 잠시 머물다 갈 손님이었다.
난 그 공간의 온전한 주인으로써 최선을 다해 나의 집에 간만에 찾아온 평화가 편히 지내기를 바라는 바다.
내 지친 마음이 기댈 수 있는 한 편의 모퉁이가 있다는 것은 절대 잃을 수 없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그것이 집 앞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가 되었든, 보일러를 한껏 틀어 데워진 방 안이되었든, 아니면 타인이 내어준 마음속 한 자리에 있든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