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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Apr 24. 2021

미혜

미래의 혜린이 혹은 미지의 혜린이

알 수 없다.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하면 그 세상에서 선택의 결과를 사는 사람이 있는 한편 또 다른 세계에서 선택받지 못한 결과를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쉽게 말하자면 말이다.

그 이론에 숨겨진 과학적 설명이나 풀이는 사실 내 귀에까지 들렸으면 이미 다 나가떨어진 지 오래니 상관치 않도록 한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오후 네시쯤 벌써 수만 갈래로 나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을 터다.

아침에 알람을 끄고 한 시간을 더 자기까지는 스쳐 지나가던 일말의 귀찮음에서 비롯된 선택이 있었다.

되지도 않는 자신감을 갖고 집에서 버블티를 만들어 먹겠다며 냄비를 젓다가 결국 계산 실패로 망해버린 타피오카 펄들이 냄비 바닥에 여즉 눌어붙어있다.

하지만 다른 평행 세계에서는 맛깔난 타피오카 펄을 쫘악 쫘악 신나게 씹어먹고 있는 내가 있을 것이다.

온라인 수업 시간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불평불만으로 보낸 지난 학기와는 다르게 이번 학기는 기필코 좋은 성적을 거두겠다는 현재의 내가 있다.

어쩌면 다른 평행 세계에서 내게 꾸준히 열성적으로 보낸 시그널이 학업 동기부여에 장작을 열심히 넣어주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이 세계도, 저 세계도, 그 세계도 따지고 보면 오롯이 하나의 완전한 세상이다.

같은 무게와 질량으로 이루어진 세상이기에 어느 곳이 더 나을 것 없는 별개의 세상들이다.

가끔 스스로 만든 선택이 무진장 후회되고 원망스러워 우주 안에 어딘가 박혀있을 다른 선택지를 뽑았을 그 행성을 목적지 삼아 아예 이민을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절실하게 들 때도 있다.

사실 가끔이 아니라 종종, 사실 그마저도 한껏 축소해서 말하는 거고, 발에 차이듯 그런 날이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러다가도 어차피 이 곳에 묶인 몸, 포기하면 편하다, 해탈하자, 공수래공수거를 끊임없이 되뇌며 마음의 평정을 찾고자 용을 쓴다.

한편, 같은 평행 이론 잣대를 들이밀자면 어차피 똑같은 나니까 그 사건, 그 선택이 아닐지언정 또 그쪽 동네에서 어떤 후회를 끌어안고 살아갈지도 이쪽 동네에 사는 나는 아마 알 일이 없을 것이다.

다 같은 나지만 다 다를 수밖에 없는 나,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다는 조성모의 애절한 호소처럼 나는 나에게 스스로를 아시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다.


4년 차 교직생활을 접고 휴직을 냈을 때, 이 선택이 옳은 걸까에 대한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

휴직을 내기 전에도 한숨 섞인 고민을 많이 했다지만 휴직을 이미 낸 후에도 걱정의 여파는 커져만 갔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지만, 엎질러져서 주워 담을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새로 파생되는 걱정은 흰 티셔츠에 묻은 과일 자국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옅지만 분명하게 그 자리에 존재했다.

스페인행 비행기 티켓을 끊으면서도 이게 맞는 선택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설렘 반, 긴장 반이라는 말이 그보다 적절하게 들어맞을 수 없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가시밭길인지, 꽃길인지 알면서 걷는 사람은 생각보다 잘 없는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시 투성이지만 직접 가보니 꽃밭인 경우도 있고, 향기를 따라 들어서게 된 길이 내 발을 피투성이로 만들 거칠고 외로운 길이었다는 걸 겪고 나서야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평행 우주를 떠올려보게 되는 것 같다.

과학을 신봉하든 더 큰 존재의 힘을 믿든 간에 그 모든 걸 떠나서 평행 우주 이론이야말로 미지의 위안을 건네주는 나름의 장치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후회를 하며 스스로에 대한 원망에 온 힘을 다 쏟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다른 세상에서 그 반대의 선택을 했을 경우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을 수도 있지 않나?

반대의 선택이 소멸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내가 그 삶을 살고 있다면 내가 하는 모든 원망이 나에게로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다른 내가 그 삶을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정신의학 분야에는 문외한이지만 논리의 비약과 사실의 왜곡은 정신적 트라우마의 극복 과정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렇다.

어떤 외부적 요소가 날 괴롭히든, 혹은 어떤 내면적 요소가 속에서 갉아먹든 난 어떻게든 이겨낼 힘을 찾아내야 한다.

주로 난 그 작업을 미혜에게 맡긴다.

미혜는 미래의 혜린이가 될 수도, 미지의 혜린이가 될 수도 있다.

여하튼 간에 다른 버전의 나다.

그 혜린이는 현재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버린 혜린이를 거두어들이고 보송보송한 실크 잠옷을 입혀 침대에 눕히고 극세사 이불을 덮어준다.

그리고선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한다.

평행우주 사이를 건너 다니며 정찰을 하고, 수많은 혜린이들이 어떤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 둘러보기도 한다.

모든 혜린이들은 각각 다른 세상에 살고 있지만 서로가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 이유는 단지 그 모든 혜린이들은 사실 하나의 혜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혜 또한 하나의 존재가 아닌 여럿의 존재이자 하나의 존재다.


내 생각은 이렇다.

다른 세계에서 사는 또 다른 존재들은 긴급 조난 신호를 수신받고 그들의 힘이 닿는 한대로 궁지에 몰린 특정한 존재를 돕고자 노력할 것이다.

내면의 힘은 사실 저 멀리에서부터 도달하는 내가 보내는 전파인 거다.

서로 다른 세상을 살지만 겹겹이 놓고 보면 사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수많은 보금자리들.

더 큰 나로 나아가기 위해 살아낼 수밖에 없는 그 모든 세상들.

내가 우주고, 우주가 나라는 어느 종교의 말씀이기도 하고, 어느 천문학자의 일언이기도 한 그 구절은 백 번 천 번 옳다.

오늘도 미혜는 알 수 없다.

뭘 모르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미혜는 혼돈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다.

미혜는 그 모든 혼돈조차 내 안의 일부임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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