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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린 May 02. 2021

bird-watcher

Rua de Washington


리스본 끄트머리에 있는 동네에서 친구네 밴드가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 친구로 말하자면, 내가 잠깐 리스본을 떠난 사이에 내 우쿨렐레를 맡아준 적이 있는, 또 음악 취향이 비슷해 수업 시간마다 메신저로 유튜브 링크를 주고받는 긴밀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고 할 수 있다.


우버는 내비게이션 위의 빨간 선을 쭉 따라 비탈길을 오르기도, 비좁은 골목에 들어서기도 몇 번을 하고 나서야 도착 주소지 꽂혀있는 깃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오르내리막에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달린지라 이십 분이 안 되는 시간뿐이었는데도 머릿속이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듯 어지러웠다.

바로 내리자마자 보인 건 두 널찍한 건물 사이에 끼여있어 상대적으로 좁아 보이는 회색 건물이었다.

잿빛 건물로 통하는 대문은 군데군데가 페인트 칠이 벗겨져 있어 나무 잇새가 벌려져 있었고, 달려있는 경첩은 잔뜩 녹이 슬어있었다.

좁아 보이는 건물에 더 좁게 나있는 대문은 스스럼없이 열렸는데, 그건 안에서 누가 열어준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분 바람에 본디 열려있던 틈이 조금 더 그 입을 더 벌린 모양새였다.

그와 동시에 안에서 막혀있던 온갖 왁자지껄한 소음이 덩어리 져 허용된 경계선 밖으로 토사물처럼 엎질러졌다.

23번지 건물의 열린 대문 틈새를 비집고 나오는 단정치 못한 소음은 마구잡이로 일요일 오후의 한적함을 할퀴고 찢었는데 난 그 앞에 서서 저 문을 얼른 닫고 들어가야 하나, 아니면 친구가 나올 때까지 일단 이 자리에 서서 기다려야 하나 많은 생각이 빗발치듯 스쳐 지나갔다.

걸음을 움직여 열려있는 틈새로 누군가 보이는지 보기로 마음먹고 몸을 틀어 몇 걸음을 이동했는데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더 확인할 새도 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친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해? 얼른 들어와!”

날 재차 부르는 소리에 조금은 머뭇거리는 움직임으로 대문 앞에 섰더니 이미 반쯤 열려있던 대문은 안에서 친구가 문고리를 잡아 연 탓에 아예 활짝 열어젖혀졌다.

그 안의 생태계는 너무도 낯설고도 신비해 내가 여태 봐왔던 세계들과는 상이해 보여 문득 무심코 지나가던 길에 때마침 열린 포털에 발을 디딘 듯한 느낌이 들었다.

봐선 안 될 것을 본 것도 아니거니와, 가서는 안될 것을 간 것도 아닌 것을 괜히 옷소매를 한 번 더 접었다 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옥상에서 공연하고 있어. 우리 밴드는 바로 다음 순서야. 긴장돼 미치겠네, 진짜. 이러다 토할 것 같아.”

옷깃을 매만지는 내 팔목을 덥석 잡고는 바로 옥상으로 올라가자는 말에 등 떠밀려 앞장서는 신세가 되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집인지 도통 확인할 새도 없이 꼬아져 올라가는 층계를 연이어 올라가다 보니 옥상으로 이어지는 문이 보였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네댓 명을 마주치며 눈인사를 주고받았는데, 그중에 몇은 한 손에 맥주캔을 들고 벽에 기대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나머지 몇몇은 나와 내 친구 뒤에 기다란 꼬리처럼 붙어 다 같이 옥상에 마련된 공연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불현듯 든 생각은 수치의 오차범위였다.

세명에서 열명쯤 될 거라는 친구의 전언이 있었지만 대강 헤아려도 나와 그 친구, 그 친구 밴드 일행부터 세명을 넘기는데 최소인원 설정에서부터 오류를 범했다는 것쯤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3과 10은 전혀 관련 없는 이질적인 숫자였기에 친구가 아무렇게나 던진 말이라고는 어느 정도 예상한 바가 있었지만 바로 문 닫고 들어온 실정인데 여기서 보이는 머릿수만 해도 열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게 뭔가 불안했다.

이건 소규모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으며 확실히 인원수 측정의 오차 범위는 초 단위를 다투며 확연히 올라가고 있었다.


옥상의 문을 엶과 동시에 내 얼굴로 쏟아지는 어둠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어둠이 아닌 사람의 인영이었고, 그것이 내게 쏟아진다고 느꼈던 이유는 실제로 그 사람이 내 쪽으로 기울여 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 단순하고도 복잡한 물리적 인과 관계를 파악하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지고 난 뒤의 일이었다.

키가 큰 그 실루엣의 빈 틈바구니에 잽싸게 몸을 말아 넣었고, 평소에는 한심할 만큼 따라주지 않는 운동신경이 그나마 알맞은 타이밍에 제 본분을 발휘한 덕에 같이 바닥을 나뒹굴지는 않고 옆으로 조금 휘청이는 정도에서 마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련의 이벤트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시선을 옮기며 재빠른 추론을 여러 방향으로 세워보지만 결론을 좀처럼 나지 않다가 이 낯선 이, 그 말인즉슨 자기 혼자 자빠져 넘어지지 않았더라면 나를 비롯해 내 뒤에 서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무너트렸을 도미노의 첫 단추인 저 치는 왜 저리 평온하게 바닥에 누워있느냐 하는 의문에 도달하고 만다.

미심쩍은 눈길로 멀거니 쳐다만 보는데 발라당 넘어진 그 속도의 반을 가른 것만큼이나 빠른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제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저벅저벅 뒤편 어딘가로 걸어간다.

멀쩡한 사람이었나, 차림새는 썩 그렇잖아 보이는데.

사람의 현 상태를 나타내는 가시적 지표가 여럿 있다고들 하는 반면,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가치롭다고 여기는 만연한 유물론적 관점에 반기를 드는 세력도 있기에 이따금씩 내면세계는 영토확장에 혈안이 된 두 세력의 싸움판이었다.

하지만 엎치락뒤치락거리며 지지부진인 싸움인 데다 어느 한쪽의 확연한 승기가 잡히지 않아 그 흐름은 시시한 소모전으로 흘러간 지 꽤 된지라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가 쉽지 않았다.

이 사람, 나와 몸통 박치기를 해 쓰러트릴뻔한, 그래서 어쩌면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을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계단 아래로 굴렸을뻔한, 아마도 그 때문에 주말 오후고 뭐고 기분만 잡치고 집에 돌아갔을뻔한, 그 모든 예후가 좋지 않은 그랬을 뻔한을 자초한 주인공인 이 사람은 그 행색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온전히 강경 유물론자의 관점을 취하자면 말이다.

꾀죄죄한 몰골에 겹겹이 걸쳐 입은 카디건과 점퍼의 색은 한참 전에나 색이 바랬을 법했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그렇게나 애타게 찾고자 했던 건 거대한 앵무새였다는 것에 있었다.

앵무새라니, 앵무새가 왜 여기에 있어, 내가 지금 앵무새를 보고 있는 건가, 앵무새라고 진짜, 앵무새가 말이 되나, 아니 잠깐, 지금 저 앵무새 발에 혹시 목줄이 달려있는 건가, 저 사람이 기르는 앵무새인가 보네, 아니 앵무새가 반려동물이긴 한가, 그런데 앵무 새니까 반려 조류라고 명명되어야 하는 게 더 정확한가.

재차 뒤엉켜 나오는 질문들을 꾹 삼키고 그 낯선 타인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자니 요란한 깃털로 치장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눈만 꿈벅거리는 앵무새를 제 어깨 위에 턱 얹더니 위풍당당하게 옥상 문을 열고 현장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 모든 순간들은 내가 여느 때와 다름없던 일요일 오후, 친구의 초대를 받고 우버를 잡아 23번지에 도착한 뒤, 옥상에 다다라 문을 열고, 공연장에 입성한 그 단순하고도 평면적인 시퀀스를 이루는 일부 장면들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다시금 반추해보자면, 그래, 참, 23번지는 어지간히도 희한한 곳이긴 했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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