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덩, 헤엄.
몇 년 전부터 여러 우물을 파고 있었지만 어느 한 군데에 정착하지 못하는 취미 유목민의 삶을 살고 있는 참이었다.
그러면서 나와는 전혀 접점이라고는 없을 것만 같던 수영장에 풍덩 빠져버렸다.
다들 수영장은 장벽이 높은 운동이라고들 한다.
일단 가서 샤워부터 해야 되는 데다가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운동보다도 맨살을 많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들도 필시 한둘은 아닐 것이다.
들어가는 길에 한 번, 나오는 길에 또 한번 샤워를 해야 되면 건성인들은 버석거리는 괴로움에 시달릴 것이고, 민감한 피부를 가졌다면 수영장의 소독물에 자극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마저도 모자란 건지 이 운동은 계절까지 탄다.
여름이야 워터 스포츠의 계절이니 고사하더라도 가을의 끝자락만 접어들어도 수영 용품에 손이 쉽사리 가지 않으니 겨울이야 말에 뭐할까.
실내수영장이라 겨울에 못 가는 게 말이 되냐는 반박이야 물론 할 수 있지만 말이 안 되는 건 실내수영장의 출입 여부가 아니라 내 약디 약은 의지다.
이러나저러나, 수영은 사방이 지뢰인 셈이기에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핑계 삼아 운동을 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백기를 휘날릴 종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뢰밭에 뛰어든 용감한 자들은 금방 또 매력에 흠뻑 빠져든다.
물장구 이백 번, 음파 음파 이백 번의 수난시대까지 거쳤다면 그 이후부터는 나가려야 나갈 수 없는 늪이다.
중간중간 위험이 도사리기도 한다.
이따금씩 오는 수영 권태기, 즉 수태기다. 실력 증진이 확연히 보이지 않을 때 흔히들 겪게 된다.
수태기의 가장 고통스러운 점은 수영에 대한 애정은 식지 않았으나 애정의 크기와 비례해서 늘지 않는 실력에 자존감이 꼬르륵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예 수영을 못한다면 몰라도 이제는 자유형 정도는 하는데, 혹은 평형까지는 하는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절망감에 휩싸이면 수영복을 빨 기력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같은 왕초보 레인에서 시작한 수영 동기들이 하나둘 중급 레인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 아찔한 절망의 블루홀에 던져져 버렸다.
정말이지 의욕 제로의 상태에서 수영장에 하루하루 나가는 것도 귀찮고 번거롭기 짝이 없었다.
그럴 때는 장비를 교체해주거나 잠깐 쉬어주는 것도 좋다는 수영장 고인물로 알려진 친구의 조언에 나는 두어달 때쯤 수영장 락커 짐을 뺐다.
장비 교체가 언급돼서 하는 말이지만 모든 스포츠가 다 그렇다고들 하지만 수영장은 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영장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생태계가 있다.
어두운 계열의 민무늬 수영복이라면 초보거나 그 수영장에 다닌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이다. 적은 확률로 무채색이 미적 취향일 수도 있다.
반대로 온갖 화려한 무늬로 버무려지거나 네온사인보다도 빛나는 형광색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은 정말로 고이고 고이신 분들이다.
이는 수영복뿐만 아니라 수경이나 수모, 심지어 오리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어떤 템이든지 과감할수록, 화려할수록, 다채로울수록, 그 사람은 육지에서조차 수영장의 소독물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는 사람인 것이다.
다시 돌아와서, 수태기가 온다면 어떤 방법을 택하든 간에 아무쪼록 그 짧은 시기를 잠깐 이겨낸다면 다시 수영장 붙박이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
수영장의 진급은 언제나 짜릿하다. 새로운 영법을 배운다는 것 또한 흥분되는 일이다.
다이빙을 처음 배운 날이 기억난다.
수심 2미터가 되지 않아 사실은 다이빙을 하면 안 되는 곳인데 회원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다이빙을 진도에 넣고 다만 혼자 옆에서 노심초사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선생님의 일언이 앞서 있었다.
자세를 익히고 여러 차례 앉아서 연습도 해본다. 이는 며칠에 걸쳐서 천천히 이루어진다.
직접 다이빙을 하는 날에도 선생님이 물속에 들어가 우리의 손 끝을 하나씩 잡아주신다고 하셨다.
다이빙만큼 멋진 자세는 없다, 감정은 무르익었다.
그렇게 어느 한 용감한 아저씨가 가장 첫 스타트를 끊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설렘에 가득 차있었다.
아저씨는 한 발을 떼고 선생님의 신호가 있기도 전에 머리를 냅다 들이박았다.
수영장 물은 그 날따라 맑았나 보다. 아저씨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한 잔상을 남기며 우리의 시야에 가득 찼다.
아저씨가 팔을 뻗으며 바닥을 짚는 모습. 벌어지는 입과 거칠게 뿜어져 나오는 기포들.
수면 위로 뻗어진 아저씨의 털이 숭숭 난 다리와 맹렬히 중력을 거부하는 두 발의 움직임까지.
한 컷 한 컷이 강렬한 크로키첩의 낱장이었다.
아저씨는 그렇게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첫 다이빙을 완수했다.
그것은 수영보다는 싱크로나이징의 한 동작에 가까웠다면 가깝겠지.
그 돌발상황 이후로 다이빙 수업은 3주 뒤에야 재개됐다.
선생님의 놀란 마음이 진정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모든 스포츠는 부상의 위험을 껴안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내 몸을 내가 지키고자 하는 마음과 안전수칙을 따르는 정신만 철저해도 다칠 일은 없다.
오히려 수영은 운동이라기보다는 물놀이라는 느낌이 더 강해서 그 높디높은 벽만 넘어오면 재미를 쉽게 붙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디선가 스트레스는 수용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어 며칠씩 지쳐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면 힘을 내서 샤워를 하거나 아니라면 얼굴에 물이라도 묻히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몸이 무거워 도저히 손도 까딱할 수 없다면 세면대 앞에 서지도 말고, 샤워기를 틀지도 말고 비척비척 일어나 한 손에 수영복만 챙기자.
눈곱도 떼지 말고 갈라진 앞머리도 정리하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수영장에 가서 나를 빠트리자.
일어나는 물보라 속에 고요히 뻐끔뻐끔 공기방울만 내보내면 일초 일초, 시간이 지그시 흘러간다.
눈을 뜨면 볼록거울과 오목거울이 겹쳐진 것처럼 눈 앞이 시퍼렇게 흐리다.
물미역처럼 머리카락들이 흔들리고 내 손도 발도 마지못해 떠오를 쯤에 수면 위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본다.
한 톨의 작은 산소마저 뱉어버리고 다시 크게 숨을 들이쉰다.
내 폐를 가득 채우는 생명의 숨이다.
인간의 70프로는 수분이다. 태어날 때부터 우린 이미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태아였던 나는 과연 어떤 영법을 구사했을까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지금 자신 있는 평영이 아녔을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인간이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지구 또한 70프로 바다로 이루어졌다.
인간은 이렇게나 물과 연이 깊다.
그러니 본능적으로 물을 향한 갈망이 혈관과 힘줄을 타고 흐르는지도 모른다.
오르고 오르고 오르기만 해야 되는 세상에 신물이 날 때가 있다.
사실 그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왼쪽을 보든, 오른쪽을 보든 나와 어깨를 나란히 겨루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내 머리를 누르고 나를 밟고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다.
가라앉고 싶다.
누군가 날 묻었으면 좋겠다.
들숨과 날숨의 교차조차 버겁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느라 내 손이 다 부르텄다면 나는 더 이상 위를 올려다보지 않는다.
나는 모든 걸 다 털고 맨몸으로 물속에 날 던진다.
가라앉는다, 가라앉는다, 더 깊숙이.
그러다 더 이상 가라앉아지지 않는 순간이 오면 무거운 반동으로 앞으로 튕겨져 나간다.
나의 팔과 다리가 날쌔게 움직인다. 땅이 날 메어 드는 힘은 반절이 된다.
물속에 묻힌 나는 들숨과 날숨을 세차게 내뱉으며 그 추진력으로 나아간다. 물을 가로지른다.
하얗게 튀는 포말을 확인하며 폐부 깊숙이 끌어당겨져 오는 뻐근한 근육의 박동을 느낀다, 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