遊於藝(유어예), 藝에 노닐다

남전 원중식 선생을 기리며

잡동사니를 담아놓은 바구니를 정리하다가 usb 외장하드 하나를 발견했다. 무엇이 들어있을지 열어보니 파일명이 ‘남전 원중식 유작전 보도자료’다. 2016년 11월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를 알리는 자료였다. 현역 시절에 받은 것인데 이 전시를 내가 기사로 다뤘던 기억은 없다. 미술에 집중했던 때문이겠지만 관심을 갖기엔 나의 식견이 부족했던 탓이리라.

뒤늦게 자료를 열어 본다. 첨부된 작품 이미지들은 아마추어의 눈으로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다. 남전(南田 元仲植, 1941~2013)의 프로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분이고 글씨 또한 완벽을 넘어 독창적인 경지에 이르렀던 것 같다. 남전은 추사 이후 한국 서단의 거목으로 꼽히는 검여 유희강(劍如 柳熙綱, 1911~1976)에게 사사한 뒤 서단의 기둥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그는 1960년 대학 1학년 때부터 검여에게 서예를 배우기 시작해 재학 시절인 1963년부터 국전에서 4번 입선하는 등 일찍이 자질을 인정받았다. 그는 1968년 스승 검여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자 스승을 업고 다니며 극진히 간호하고, 그에 힘입어 검여는 10개월 만에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쓰는 좌수서( 左手書)를 통해 기적적으로 재기한 미담은 국내 서단에 회자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종고락지, 남전 원중식

유작전 준비위원회는 전시를 위해 3년 동안 전국의 지인, 유적 등 소장자를 찾아다니며 서예와 문인화 670여 점과 전각 320점을 확보했다. 그 이유는 생전에 남전이 글 값, 그림 값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도자료에 쓰인 대목을 옮겨본다.

‘남전은 자신의 서예 예술을 처절하리만치 엄격하게 정진하여 티끌만 한 부끄러움도 없는 정도를 걸었으며,‘서예는 밥벌이 수단이 아니다’는 그의 지론과 같이 평생 자신의 작품을 선물해 주면서도 값어치를 따지거나 보상을 바라는 등 서예를 통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천진난만, 남전 원중식

서예가가 서예가답게 자신의 순수성과 예술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각자가 서예 이외의 나름의 생업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서 얻은 항산(恒産·일정한 벌이)의 여력을 글씨공부에 쏟아 부울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고 여겼다. 서예에 몰두하기 위해 자신의 직업(서울시 공무원)을 가졌다. 진정한 서예가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남전은 도연명(陶淵明)을 흠모하여 50세에 20여년의 공직생활을 훌훌 던져 버리고 강원도 인제의 심신산골, 속초, 화진포 등지에 살면서 자연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예로써 명성을 떨치려하지 아니하고 묵묵히 필묵과 벗삼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정진했다. 유일한 욕심이 있었다면 자신의 재능을 후학들에게 물려주어 검여를 잇고자 함이었다. 검여 선생에게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듯이 후학들에게도 아무런 대가 없이 지도했으며 공직 은퇴 이후 서예계의 중진으로 활동하면서 생기게 된 수익금의 대부분을 후학 양성을 위한 장학 사업에 기부했다.


유어예, 남전 원중식

신문에 칼럼을 쓰면서 늘 원고료가 너무 박하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글쓰기가 더 이상 밥벌이도 아니거늘. 자존심 때문이었는데 내가 쓰는 글에 정성을 다해 완성도 높은 글을 쓴다면 글쓰는 이에겐 그게 최고의 보상이라고 생각해야 겠다.

남전의 서예·문인화 200여 점과 전각 50여 점을 선정해 보여줬던 서예박물관 전시를 놓친 것은 아쉽지만 남전의 정신은 살아 남아있으니 이제부터라도 본받는 노력을 해야겠다. 전시회의 제목이 너무 맘에 들어 수첩 첫 장에 적었다.

‘遊於藝 (유어예), 예에 노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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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이미지는 2016년 11월 서예박물관 전시 보도자료로 제공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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