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계곡의 군 내무반이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서울신문에 <건축 오디세이> 시리즈를 연재하면서 많은 공간을 다니고 있습니다. '오디세이(odyssey)'란 트로이 전쟁 후 집으로 돌아가는 영웅 오디세이우스의 긴 여정을 노래한 호메르의 장편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영어식 표현이죠. 사전적 의미로 하자면 장기간의 방랑과 모험을 뜻합니다. 건축의 가능성을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의미로 시리즈의 제목을 지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공간은 인왕산에서 수도경비를 하던 군인들의 내무반 (인왕 3분초)에서 시민들을 위한 쉼터로 변신한 '인왕산 숲 속 쉼터'입니다.
'인왕 3분 초'라니? 이건 뭐지? 분초를 다툰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3분 초는 참 낯설었습니다. 군대 다녀온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으려나? 아무튼 숲 속 쉼터라고 하니 신록이 우거진 봄에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 벚꽃이 지고 복사꽃이 떨어지며 숲에 초록빛깔 살이 오르기 시작하는 4월 하순을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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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사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요즘처럼 나무의 연둣빛 새 잎이 터져 나오는 요즘의 산하는 정말 그렇다. 몽실몽실 연둣빛 잎이 피어나는 숲이 우리를 부른다. 책 한 권 들고 숲을 찾아 하루를 느긋하게 보낼 수 있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다. 수려한 풍광의 인왕산 계곡 사이에 자리 잡은 ‘인왕산 숲 속 쉼터’는 그런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주는 공간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시민들에게 개방된 ‘인왕산 숲 속 쉼터’는 인왕산 자락길에 위치한 ‘인왕산 초소 책방’에서 길을 건너 460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한다. 인왕산 정상에서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혹은 한양 성곽 길에서 인왕산 정상 방향으로 가는 등산로에서 만날 수 있지만 어떻게 가든 만만치 않다. 접근이 어려운 만큼 세상과 잠시 단절된 채 차분하게 자연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인왕산 숲 속 쉼터’를 설계한 건축가 조남호 솔토지빈건축사사무소 대표, 에스엔건축사사무소 김상언 소장과 함께 계단을 올랐다. 두 차례 정도 쉬면서 내려다보니 청와대와 경복궁, 서울의 중심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도착한 숲 속 쉼터는 등산로에서 비껴 나 숨겨진 계곡에 면해 있다. 계곡 사이 필로티 구조 위에 격자의 나무틀로 된 유리 구조물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성곽을 따라 이어지는 북쪽 등산로와 인왕산로에서 올라오는 남쪽 등산로가 쉼터 후면에서 반층의 단차를 두고 연결된다. 반층 더 내려가면 쉼터로 들어갈 수 있다. 건물의 외피는 규화목을 세로로 붙였지만 건축적 산책로 역할을 하는 진입로와 지붕은 알루미늄 그레이팅 소재를 사용했다. 통로부터 지붕까지 알루미늄 그레이팅으로 이어진 까닭에 바쁜 등산객은 이런 쉼터 공간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다.
조남호 대표는 “자연환경 속에서 새로운 시설과 사람의 활동이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라 조화롭게 덧 씌워져 감으로써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나는 서사적 풍경을 추구했다”면서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루미늄 그레이팅의 간격 사이로 식물들이 왕성하게 자라면 시간 속에서 구축물이 자연과 섞여갈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리에 이런 건축물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답을 얻으려면 먼저 알아야 할 사건이 있다. 지난 1968년 1월 21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서울 종로구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던 사건이다. 경찰과 대치하며 총격전이 벌어졌던 이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김신조 소위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던 이 사건 이후 북악산과 인왕산에 30여 개의 군 초소가 설치됐고 오랫동안 시민들의 출입이 통제됐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2018년 인왕산을 전면 개방하기로 하면서 관련 군 초소 및 경계시설은 대부분 철거됐다. 한양도성 성벽에 설치된 경계 초소를 2개만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보존했다. 서울시와 종로구는 역사적 장소를 시민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인왕산 자락에 청와대 방호 목적으로 지어졌던 경찰초소(인왕 cp)는 서울시립대 이충기 교수의 설계로 리모델링해 ‘인왕산 초소 책방- 더숲’ 북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초병들의 거주공간이었던 인왕 1분 초와 2분 초는 철거되고 인왕 3분 초는 ‘인왕산 숲 속 쉼터’로 변신했다. 두 건물은 비슷한 시기에 공사를 시작했지만 숲 속 쉼터의 경우 접근성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이곳에 사용된 목재는 공장에서 제조된 목구조를 헬기로 이동해야 했다.
조 대표는 “초병들의 내무반은 시멘트 블록에 샌드위치 패널로 지은 건물이었는데 철근 콘크리트로 된 필로티 위의 상부 구조물을 철거하고 시민들을 위한 쉼터로 재구성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언 소장은 “가장 친환경적이고 공간의 쓰임과 어울리게 목구조로 만들었다”면서 “쉼터의 기본 평면은 원래 내무반이 있던 구조 그대로이고 지붕의 소재는 달라졌지만 모양은 예전 그대로”라고 덧붙였다. 여전히 국방부 소속인 이 건물 지하 1층 통신실도 그대로 있다.
조 대표는 “오랜 반목과 통제의 상징인 3분 초가 개방의 시대에 교류를 상징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역설적”이라며 “이 같은 인왕산 숲 속 쉼터의 장소적 의미는 서촌의 중인들이 주도했던 ‘위항 문학(委巷文學)’과 연관 지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항문학이라고도 하는 위항 문학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한양에서 중인들이 주도한 문학운동으로 이들은 경치가 빼어난 인왕산 아래 계곡 등지에 모여 시 짓기를 하면서 교류했다. 주로 서촌에 거주했던 중인들은 역관 등을 하면서 중국에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인 사람들이었다.
조 대표는 “계급사회에서 신분의 속박 속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한 그들은 신분 상승의 욕구와 현실 비판을 위항 문학으로 승화시켰다”며 “중인들이 위항 문학을 통해 보여준 문화의 역설을 숲 속 쉼터 프로젝트에서 건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숲 속 쉼터는 목구조이지만 목구조의 전형적인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 전통적 목구조의 건물은 선이 중심이지만 현대 목구조 건물은 콘크리트 구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면과 덩어리(매스)의 구현이 가능하다는 점을 활용한 결과다.
“목조의 구법은 부재들을 입체적으로 조립해 3차원을 구조물을 조립하는 방법입니다. 일반적으로 텍토닉이라고 하죠. 다양한 크기의 선 부재들이 위계를 따르는 맞춤과 조합을 통해 구조물을 이루는데 숲 속 쉼터에서는 철근 콘크리트 기둥 모듈의 2분의 1 간격으로 목재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지붕판을 끼워 넣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 (조 대표)
목재 구조물에서 하중 전달은 거대한 크기의 지붕판을 목재 기둥 위에 얹는 것으로 처리하는데 여기서는 얹지 않고 그 사이에 끼워짐으로써 목구조의 무거운 인상은 가벼운 인상으로 변환된다. 이처럼 물질을 비물질로 보이게 하는 구축적 역설을 조 대표는 ‘비결구적 결구’라고 표현했다.
김 소장은 “일반적으로 전통 목구조에서는 포와 서까래 결합이 조합을 이루지만 이곳은 기둥이 있고 여기에 50㎝ 폭의 판들이 끼워진 상태”라며 “보가 판에 통합되어 있고 그 사이에 간접 조명을 설치해 무게감이 없게 만드는 동시에 시선을 밖으로 이끌어가는 효과를 이끌어 냈다”고 설명했다.
내부의 목재는 수프러스 집성목에 흰색 칠을 해서 공간적으로 넓어 보인다. 세로로 긴 직사각형 창의 프레임을 통해 자연경관이 시원하게 내다 보이는 실내는 무겁지 않고 가볍고, 현대적으로 보인다. 밖을 향해 창가에 놓인 낮은 안락의자와 서가는 건축가 장영철이 디자인한 것이다. 숲 속 쉼터는 긴 테이블을 두어 가끔 지역 문화단체들이 시간을 나눠 쓰며 프로그램을 운용할 수 있도록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쉼터이다. 관 주도의 공공건축은 무언가 역할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지만 이곳은 애초부터 용도를 정하지 않았다.
조 대표는 “SNS에 소개되는 사진물을 통해 이용자들이 이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 있는데 대부분의 사진들에 프레임이 기본으로 들어가 있다”면서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사람들이 이곳에서 외부 경치를 바라보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내는 쉼터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앞으로 공공 건축에 예산을 더 많이 써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공건축은 예산이 빡빡해서 의도를 잘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좋은 것은 개인들이 능력 껏 갖추고 살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오히려 모두가 함께 누릴 수 있는 공공건축에 비용을 더 들여서 잘 만들어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좋은 장소에 위치한 좋은 공간이 이렇게 하나둘씩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유 있게 시간을 내어 다시 찾고 싶다. 인왕산 숲 속 쉼터는 월요일과 명절을 제외한 매일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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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쉼터는 아주 조용합니다. 취재를 하러 갔을 때 너무 조용해서 정적을 깨고 설명을 들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밖에 나가서 인터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자 조남호 건축가는 안에서 설명을 해야 하니 아예 다른 분들도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즉석 답사 모임이 진행 됐습니다. 다시 460여개의 계단을 내려와 <더숲 책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보충취재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리가 묵직했습니다. 지은 이들이 참 고생을 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화려한 도시의 불빛을 멀리서 보면서 인왕산 초소에서 밤에 근무를 섰던 군인들. 서울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었던 초병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쉼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까지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면 무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