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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노마드 함혜리 Jul 05. 2023

[해외미술소식] 유럽은 지금 바스키아에 빠져있는 중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980년대 미술계를 뒤흔든 반항적인 화가였다. 바스키아는 또 ‘팝아트의 황제’로 20세기 후반 미국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과 우정과 애정을 넘나드는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다.  바스키아의 작품은 마치 우주인이 그린 듯한 이해할 수 없는 도상과 이미지들, 강렬한 색채와 글자들로 가득하다. 어느 사조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화법에 진지하고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예술가였던 바스키아가 지금 유럽 대륙을 뒤흔들고 있는 중이다. 

예술의 중심 프랑스 파리에 있는 루이뷔통재단 미술관에서는 바스키아가 32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예술적 세계관을 공유했던 워홀과 협업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바스키아 ×워홀: 포핸즈 회화(BASQUIAT×WARHOL:PAINTING FOUR HANDS)’(5월 4일~8월 28일) 전이 열리고 있다. 현대미술의 중요한 미술관 중 선두로 꼽히는 스위스 바젤의 바이엘러재단 미술관에서는 바스키아가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작업한 대형 캔버스 회화작품 8점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장미셸 바스키아 모데나 회화 전 (6월 11일~8월 27일, Jean-Michel Basquiat -The Modena Paintings’ 전이 열리고 있다. 

파리 루이뷔통 재단의 전시는 지난 2018년 ‘장 미셸 바스키아전’에 이어 워홀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를 보다 깊이 탐색해 보기 위해 기획됐다. 두 사람은 1984년과 1985년 2년 동안 약 160점의 그림을 함께 그렸는데 그 가운데 절반인 80점이 이번 전시에 소개되고 있다. 

소호의 거리에서 그라피티를 하고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던 아이티계의 바스키아와 당대 비평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아티스트 워홀이 만나서 함께 작업하고, 결별하고,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 이야기는 현대미술사의 흥미로운 한 장을 장식한다.  

바스키아는 아이티계 미국인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1960년 태어났다. 회계사인 아버지가 사무실에서 가져온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어린 아들의 창의적인 면을 눈여겨본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브루클린미술관 주니어회원으로 등록함으로써 일찌감치 예술에 대한 사랑을 심어줬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에 능통했고 창의력이 뛰어난 바스키아는 예술지향적 사립학교 세인트앤스에 다닐 때 친구와 어린이 그림책을 만들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글을 쓰고 친구 마르크 프로조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17세가 된 바스키아는 학교를 그만두고 친구 알 디아즈와 함께 맨해튼과 소호지역의 거리와 건물에 스프레이로 그라피티를 그리며 SAMO(Same Old Shit·흔해 빠진 낡은 것)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라피티는 당국의 입장에선 논쟁적이고 도발적이었지만 앤디 워홀을 비롯해 당시 예술계 인사들에게 ‘SAMO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소년’으로 바스키아의 존재를 알리는 매개체가 됐다. 

뉴욕 그린위치빌리지의 거리에서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고 용돈 벌이를 하면서 TV출연을 하기도 했던 그는 1980년 ‘타임스퀘어쇼’를 통해 작가로 본격 데뷔했다. 1981년 카셀도큐멘타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던 바스키아는 그의 예술적 멘토였던 앤디 워홀과 교류하게 되면서 일약 스타작가로 발돋움했다. 두 사람은 워홀의 동료인 미술상 브루노 비쇼프베르거 (Bruno Bischofberger, 1940~)와 그라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Keith Haring,1958~90)의 소개로 만났다. 비쇼프베르거와 해링은 1982년 10월 앤디 워홀에게 바스키아를 소개했다. 워홀의 작업실 ‘공장 factory’에서였다. 

당시 54세였던 워홀은 22세에 불과한 바스키아와 함께 폴라로이드를 찍었다. 바스키아는 집으로 돌아가 2시간 만에 이 사진을 바탕으로 워홀과 자신의 얼굴을 그려 물감이 마르기도 전에 워홀에게 보냈다. 워홀은 그 작품의 뛰어남에 경외감을 느꼈다. 마스크, 두개골, 그라피티, 모호한 상징은 곧 워홀의 팝 아트 이미지, 로고, 신문 헤드라인과 함께 공동 초상화로 결합됐다. 그 유명한 ‘두 개의 머리( Dos Cabezas, 151.8 × 154cm, 1982)’다. 

이후 두 사람은 친구 사이를 넘어 거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은 사랑과 지원의 연결로  이어진다. 워홀은 바스키아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바스키아는 1983년 8월 워홀 소유의 다락방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예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공통의 관심사가 많았던 두 사람은 1984년부터 공동 작업을 만들기 시작한다. 첫 공동작업에는 워홀과 바스키아 외에 이탈리아 작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가 참여했다. 스위스에 있는 비쇼프베르거의 차고에서 함께 하거나 한 사람이 그림을 그려 우편으로 보내면 그 위에 그림을 덧그려 보내는 방식으로 15점을 완성했다. 이후 워홀과 바스키아의 협업이 본격화됐다. 워홀의 팝아트 기법과 바스키아의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회화가 결합한 제3의 작품을 제작했다. 다양한 작품들은 예술계의 이데올로기적 억압에 대한 일종의 장난스러운 진술 같았다. 두 사람 모두와 친구였던 해링은 “그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화”라고 두 사람의 협업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은 협업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1985년 가을 열린 ‘앤디워홀과 장 미셸 바스키아’ (1985.9.14.~10.19) 전이 혹평을 받으며 금이 갔다. 합작한 작품 16점이 출품된 전시회에 대해 당시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가) 워홀의 명성에 편승했다”, “(워홀은) 젊은 바스키아의 인기를 이용한다”며 두 사람 모두를 싸잡아 비난했다. 실패한 전시회에서 비롯된 갈등은 더욱 심해져서 두 사람은 결별했다. 워홀은 집착적으로 바스키아에게 연락했지만 바스키아는 좌절과 분노를 이기지 못했고 마약에 과하게 의존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던 중 워홀이 가벼운 담낭수술을 받은 다음날 상태가 급작스레 악화돼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87년 2월 22일 워홀의 나이 58세였다. 워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바스키아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상심한 바스키아는 더욱 마약에 의존하다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28세의 나이로 워홀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은 많은 미스터리를 남겼지만 걸작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어 지금의 우리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다. 

두 천재 예술가의 협업 작품을 보여주는 루이뷔통 재단의 전시는 개인 소장자들의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길이 10m의 기념비적인 작품 ‘아프리카 가면’에서는 한 예술가의 작업이 어디에서 끝나고 다른 예술가의 작업이 시작되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Ten Punching Bags’는 워홀이 만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판사’라는 단어와 가시관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린 것이다. 두 예술가의 생애 동안 한 번도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이다. 

루이뷔통 재단의 수석 큐레이터이자 바스키아 전문가인 디터 부하르트(Dieter Buchhart)는 AFP와 인터뷰에서 "두 명의 위대한 예술가가 이뤄낸 작업은 예술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협업임이 분명하다. 이 정도 수준이나 짧은 시간 내에 일치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협업작품들은 두 사람의 스타일, 나이, 성격 등이 충돌하면서도 그 결과로 나타나는 놀라운 조화를 보여준다. 재단의 예술감독 수잔 페이지는 "워홀도, 바스키아도 아닌 제3의 예술가의 등장을 목도한다"고 말했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은 아트바젤을 만든 바젤 기반의 화상 에른스트 바이엘러와 힐디 바이엘러 부부가 평생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들과 아프리카, 알래스카 등 비유럽권 민속예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지은 미술관이다. 매년 아트바젤 기간에 맞춰 공들인 기획전시를 개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의 아티스트는 해를 거듭할수록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1982년 여름 이탈리아 모데나의 에밀리오 마졸리 Emilio Mazzoli 갤러리에서 열리기로 한 그의 유럽 첫 개인전을 위해 모데나를 여행했다. 21세의 뉴욕 예술가였던 그는 불과 며칠 만에 8개의 대형캔버스에 대형 작품을 완성했다. 최소 2m, 4m 크기의 캔버스에 뉴욕 맨해튼에 뿌려진 그라피티를 캔버스 페인팅으로 전환해 놓은 것 같은 작품은 규모뿐 아니라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 그중 일부는 바스키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시회가 열리기 전 전시계획이 취소됐고 작품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 이후 한꺼번에 전시된 적도 없었다. 그의 개성과 작품성을 드러내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모데나 회화’ 연작이 40년이 지나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은 것이 이번 전시다. 바이엘러 재단은 미국과 아시아, 스위스에 흩어져 있는 걸작 8점을 모아 첫 전시회를 열었다. 

모데나 회화는 아티스트로서 바스키아 경력의 시작점에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품이다. 작품들은 바스키아의 작품이 지닌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색상과 표상들이 다채롭고, 특히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표현력 풍부한 회화적 관용구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들은 바스키아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 되는 시리즈 작업으로 그가 표현하는 몇 가지 모티프와 문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바스키아의 가장 유명하고 가치 있는 작품들을 원래 의도했던 전체 앙상블 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에 앞으로 언제 다시 있을지 모르는 특별한 전시라고 할 수 있다. 

바스키아의 예술은 부와 빈곤, 통합과 분리, 내부와 외부 경험과 같은 암시적 이분법에 초첨을 맞춘다. 그는 시, 소묘, 그림을 차용하고 텍스트와 이미지, 추상화, 역사적 정보를 동시에 비평과 결합시켰다. 그의 시는 식민주의를 비판하고 계급투쟁을 지지하며 정치적인 메시지가 매우 강하다. 2017년 5월 18일 소더비 경매에서 해골을 묘사한 바스키아의 1982년 작품 '무제'는 1억 1050만 달러에 팔리며 미국예술가 중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전시회 사진 제공 =주승진) 


좀더 많은 작품 사진과 보시려면-> 

 http://www.culturelamp.kr/news/articleView.html?idxno=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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