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미켈란젤로’라고 부르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예술가의 인생은 짧지만 그가 남긴 예술 작품은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는 그가 남긴 걸작들을 접하면서 실감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대리석 조각 작품 ‘피에타’와 ‘다비드’, 그리고 천장 벽화 작업인 ‘천지창조’를 들 수 있다. ‘다비드’상은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다. 나머지는 두 걸작은 바티칸에 가야 만날 수 있다.
로마 시내에서 테베레강 건너에 위치한 바티칸은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황이 사는 성스러운 곳이고, 예술 애호가들에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천재들이 불멸의 작품을 남긴 예술의 성소이다. 바티칸 시국은 크게 성 베드로 대성당과 광장, 그리고 바티칸 박물관으로 이뤄져 있다. 원주 회랑으로 에워싸인 성 베드로 광장은 알렉산드로 7세 교황 시절 로렌초 베르니니가 1655년부터 1667년에 걸쳐 완성했다. 광장은 사각형 공간과 수많은 기둥들로 둘러싸인 원형의 광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예수가 베드로에게 건네주었다는 천국의 열쇠를 닮았다. 원형의 광장은 “여기 오는 모든 사람들을 품 안에 안아 주겠다”라고 하는 듯하다. 가장 넓은 곳이 240m에 이르는 광장을 둘러싼 기둥은 총 284개로 네 줄로 서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높이 기둥이 서 있는 회랑의 난간에는 140명의 성인들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들은 베르니니의 제자들 작품이다. 광장의 중앙에는 로마의 황제 칼리귤라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가 있고 양 옆으로 분수가 있다.
성당은 광장 쪽에서 들어간다. 내부 길이가 187m에 이르는 큰 건물로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다. 들어가서 첫 번째 나오는 소성당 오른쪽으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1499)가 있다. 미켈란젤로가 불과 24살의 나이에 완성한 걸작이다. 미켈란젤로가 서명한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수많은 피에타 가운데서도 최고로 꼽힌다. 작품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방탄유리에 쌓여 있어 미켈란젤로의 천재적 재능과 그가 의도했던 빛에 의한 효과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걸작의 아우라는 방탄유리를 뚫고 퍼져 나온다. 순결함으로 빛나는 마리아와 사랑과 희생의 상징인 예수는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미켈란젤로가 표현한 성모는 청순하고 기품 있는 불멸의 존재이다. 단단하고 담담한 표정을 통해 안으로 삼키는 고귀한 고통을 느낄 수 있다.
피렌체 출신인 미켈란젤로는 5년간 로마에서 작업을 하면서 명성과 실력을 쌓고 1501년 피렌체로 금의환향했다. 피렌체에서 자신의 기량을 돋보이게 할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두오모 작업장에서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재료로 작업하게 됐다.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시민이 주인인 공화정을 채택한 피렌체 시민위원회가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로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다비드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정한 결과였다. 피렌체의 유명한 조각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혈을 기울여 ‘다비드’상을 제작했다. 미켈란젤로에 앞서 도나텔로의 ‘다비드’(1450년, 청동, 158cm)는 강한 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베로키오의 ‘다비드’(1473년, 청동, 126cm)는 날씬하고 섬세한 감성을 지닌 소년의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작업하게 된 대리석은 크기만 컸지 폭이 좁아 40년 동안 쓸모없이 뒷마당에 버려진 것이었다. 그러나 돌 속에서 형체를 끌어내는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이 거대한 대리석을 그대로 살려 4m가 넘는 ‘다비드’ 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501년 9월 13일 작업을 시작했고 1502년 2월 28일 절반가량 진행됐고 1504년 1월 25일 완성했다.
미켈란젤로는 앞의 조각가 선배들이 탄생시킨 다비드와 달리 강한 청년 다비드를 탄생시켰다. 크기도 컸던 데다 완전한 누드로 묘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의 신앙과 용기를 부각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피렌체 지방 자치회는 피렌체의 도덕적 힘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마침 프랑스의 압력으로 피렌체에서 독립한 피사를 탈환하기 위해 파병된 피렌체 시민군에게 용기와 힘을 주기에 충분했다.
작품을 어디에 세울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시민들이 운집하는 시뇨리아 광장에 세우자고 제안했고, 이에 따라 베키오궁 앞에 설치돼 피렌체를 수호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게 됐다. 르네상스를 넘어 고금을 통해 최고의 조각품이라는 찬사를 받는 ‘다비드’상은 300년 넘게 그 자리를 지키다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현재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다비드상은 복제품이다. 피렌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에 서있는 청동 다비드상도 역시 복제품이다.
진품을 만날 수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피렌체 대성당 뒤편으로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1784년 토스카나주를 다스리던 피에트로 레오폴드 대공이 자신의 소장품을 미술학교에 기증한 것이 모태다. 미술 실습을 위한 회화 작품과 조각 본이 전시돼 있고, 2층에는 악기박물관이 있지만 역시나 1504년 완성된 다비드 오리지널 작품을 비롯해 미켈란젤로에게 헌사된 전시실이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긴 복도 끝에 연한 하늘색 돔 천장 아래에 서 있는 다비드상은 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느껴진다. 미켈란젤로 평전을 쓴 프랑스의 로맹 롤랑은 ‘천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천재란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미켈란젤로를 보라’고 했다. 인간을 초월한 숭고한 아름다움과 요동치는 내면의 에너지를 표현한 작품 앞에서 사람들은 떠날 줄은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한 발에 힘을 주고 서 있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한 다비드가 골리앗을 공격하려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조각상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왼팔은 굽혀서 왼쪽 어깨의 투석기를 잡고 있다. 엉덩이와 어깨는 반대 각도를 향해 S자 모양의 곡선을 이룬다. (실제로는 거의 불가능한 포즈라고 한다.) 아래로 내려뜨린 오른팔의 직선과 돋움 자세를 취한 왼쪽 다리가 대비를 이루며 긴장감을 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곧바른 코와 적을 응시하는 눈, 두꺼운 목과 돌출된 목의 근육, 그리고 몸통에서는 무한한 힘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게 한다. 거인 골리앗을 노려보느라 미간에 주름까지 잡혀 있고, 목의 핏줄과 앙다문 입술이 용기 있는 청년의 도전정신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받침대를 포함해 높이 5.5m인 조각상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균형이 잡힌 듯 하지만 가까이 보면 오른 팔이 신체에 비해 길고 돌을 쥐고 있는 오른손이 유난히 크다. 머리도 큰 편이고 하체는 상체에 비해 두껍다. 이런 비정형성은 미켈란젤로가 비범한 조형감으로 일부러 만들어낸 것이다. 다비드는 원래 성당 돔의 꼭대기에 설치할 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원근법으로 계산해 조각상의 각 부위를 크게 혹은 길게 만들어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감상할 때 신체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인간을 초월한 아름다움과 힘을 지니고, 감정을 드러내되 평온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품은 르네상스 미술의 일반적인 양식이 된 조각은 그렇게 완성됐다.
아카데미아미술관에서는 다비드 상 외에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조각품들을 만날 수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젊은 노예’, ‘성 마테오’, ‘수염 난 노예’ 등 미완의 작품들은 그 모습대로 의미가 있다. 대리석 덩어리를 쪼아내며 형태를 만들어 내던 미켈란젤로의 작업방식과 그의 열정 어린 손길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