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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rilim Sep 07. 2024

건강이 우선입니다.

두루


메리 님께.     


  세상에 3시간을 주무시고 길게 푹 잤다고 하시다니, 그간 정말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휴일이어도 내게는 휴일이 아닌 일상에서 잠시라도 쉬셨기를 바랍니다.     

  먼저, 종교에 대해 여쭤보셨는데요. 아쉽게도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 어머니께서 다소 불교에 관심이 있는 듯 보이긴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릴 적에는 사찰에 자주 가곤 했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 조용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괜히 조용하게 되었던 것 같네요. 특유의 그 내음도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아니, 사실 이것은 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스스로 방문한 사찰의 감각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든 저는 종교가 없지만 어머니의 영향으로 저 또한 종교 중 어느 정도의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불교라고 할 수 있겠네요.     


  메리 님의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난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면 어릴 적 우유를 곱게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는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이름 모를 어떤 존재에게 빌곤 했습니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가령 크리스마스에 갖고 싶던 선물을 갖게 빈다거나 다음 날 있을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거나 하는 식의 귀여운 것들이었죠. 아마도 알고 있는 모든 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소원을 읊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누구라도 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요. 효과가 있었냐고요? 글쎄요, 이건 확신할 수가 없네요. 어쩔 땐 맞고 어쩔 땐 틀렸으니까요.     

  

  사실 지금도 힘이 들거나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는 어떤 존재에게 기대고 싶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잘 믿지는 않는 편인데 그럼에도 삶이 큰 파도처럼 내게 밀려오면, 도무지 버티지 못하게 될 때쯤에는 나도 한없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요. 마냥 어리광도 부려보고 싶고 힘들다고 찡찡대고 싶기도 하고 하루 종일 안겨서 자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저는 이런 일련의 기대는, 기억도 나지 않을 까마득히 어린 날 버렸어요. 세상은 결국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때부터도 알았을까요. 그 누구도 내 삶을 책임져주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기 때문일까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저는 그때도, 지금도 그 누구에게도 잘 기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비난받기도 했어요. 누군가는 너무 냉정하다고도 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을 믿지 못해서 그런 거냐며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많은 이들에게 나도 모르는 사이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겁니다. 나를 지키려고 체득한 삶의 방식이 정작 나 자신도 지키지 못했으며 도리어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에 애석한 마음이 듭니다.     


  고백하자면, 이것이 때로는 삶을 고독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살기 위해 선택한 이 방식이 되려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느 순간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더군요. 모든 것이 내가 선택하고 한 일임이 분명한데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어딘가 내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더 이상 참기 힘들어서 떠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동시에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하는데,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던 시절에 더 이상 머리 아플 일도 없고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외톨이가 되어갔지요.     


  지금은 어떠하냐고요?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잘못을 크게 깨닫고 이제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의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을 했던 것이며 그게 답인 줄 알고 있었을 테지요. 그래서 현재에 있는 내가, 그저 앞으로 남은 날들을 더 충실히 살고자 노력할 뿐입니다.     

저는 늘 그때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다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어리석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뱉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때의 내가 가진 경험에서 배운 것들이었겠지요. 그 외의 것들은 곁에 두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정말 진심을 담은 조언일지라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들리지 않았습니다.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제 경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어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단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저는 그 누구도 잘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나 이외의 그 어떤 존재도 쉽게 믿지 않아요. 그렇다고 아예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그 누구든 제게는 제로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 어떤 판단 없이 그저 게임 속 존재하는 NPC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연으로 서로 이야기를 쌓아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믿음이 생깁니다. 혹은 오히려 없어지기도 하지요. 쉽게 말해 믿음이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 기준은 오롯이 제게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 지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저는 내 삶에 상대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가 중요합니다. 저는 저의 삶을 그는 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저 내 삶의 영역에 들어온 이 사람이 저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두어 주기를 바랄 뿐이지요. 그것이 제게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면 제가 종교가 없는 것에 대해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나 이외의 존재는 잘 믿지 않는 탓에 어떤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 또한 그 언젠가는 변할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늘 변화해 왔으니까요. 그땐 맞았지만 지금은 아닌 것들과 그땐 아니었던 것이 지금은 맞는 것 투성이인 제 삶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말하기가 참 어렵네요.     


  강동원 배우의 멋진 이야기 저도 보았습니다. 역시 멋지다고 생각했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몰두하고 있는 서른의 중반인 제게 큰 울림을 주는 말이었어요. 각자가 만든 나만의 세계의 규칙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지만 그 어떤 진리라는 것은 있는 것 같아요. 그 옛날 나는 살아보지 못하고 그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확인할 수 있는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도 훗날 먼 미래까지 길이 남을 멋진 명언들과 격언들은 아마도 그 힘이 남다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그냥 보고 넘겼던 말들이 이제는 들리기 시작했어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그들의 눈이 보이고 진지하게 그들의 언어를 풀어내는 그들의 입이 보이고 그들의 자신감 있는 손짓과 표정이 보여요. 진중한 목소리는 그 말에 더 힘을 실어주죠. 그들의 삶을 멀리서나마, 그리고 어렴풋이 느껴봅니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보내었을 그들의 노고를 잠시라도 이해해 보려 합니다. 아마도 이 모든 과정이 제게는 큰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저는 늘 부끄럽습니다. 아마도 평생을 부끄러워해야 할 겁니다. 제게는 이 감각이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부끄러워서 배우고 듣고 읽습니다.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거든요. 혹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저는 눈치채고 싶습니다.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걸 알고 싶어요. 그러고는 다시 반성하고 배우고 싶습니다. 다시 오늘을 잘 보내주고 내일로 향하고 싶어요. 내일은 오늘보다도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습니다. 부끄러운 과거에서 다시 부끄러운 현재를 이겨내고 다시 부끄러운 미래를 살아가겠지만 그럼에도 덜 부끄러워지고 싶어요. 적어도 저 스스로에게는요.


  부끄럽다는 말이 참 많이 나왔지요. 일부러 그랬어요. 저는 글을 쓰면서도 부끄러워했어요. 더 그러라고 많이 사용했습니다. 오늘도 또 한층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봅니다.     

화가 날 정도로 왜 안 되지? 했던 적이 있냐고요? 그것도 불같이?     

네, 그럼요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잘 안되면 바로 화부터 났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 모든 화살을 내게 꽂으면서 나를 괴롭혔습니다. 정말 순수하게 분노했어요. 스스로 주체할 수 없는 무거운 화가 온몸을 지배했습니다. 그 탓에 더 일은 엉망이 되었지요. 그러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게 얼마나 안 좋은 것인지를 깨닫고는 서서히 차분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의 무서움을 알고서 반강제로 착해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먼지보다도 못 한 존재라는 걸 이해했기 때문일까요. 어찌 되었든 현재의 저는 화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해졌습니다. 가끔 미지근한 분노가 올라오긴 하지만 그것도 금방 사라지곤 합니다. 아직 내가 인간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며 웃고 넘어갑니다.     


  지금은 대체로 화라는 감정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다 정말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 대응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염려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저는 화를 내지 않는 것이지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화를 잘 내고 싶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언제나 화를 낼 준비를 하고 있어요. 다만 현명한 방법으로 내기 위해서 스스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지요. 화를 내야만 하는 순간에 더 내 의사를 잘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그 순간이라고 한다면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나 소중한 사람들이 안전을 위협받을 때와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럴 때 감정이 앞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더 슬플 것 같기 때문에 저는 화를 내더라도 모두를 지킬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모두에는 나,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 심지어 화를 나게 만든 상대까지도 포함입니다. 그래서 화라는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더 노력해 보고 싶습니다.     


  답장이 많이 늦어졌네요. 어느새 6월이 되었습니다. 큰 행사가 있어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요.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감정과 감각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것들도 생겨나요. 아마도 저는 성장 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는 그저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크게 들면 도망가기 바빴어요. 그러나 이제는 모든 감정들을 오롯이 마주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이 다소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다가오는 수많은 감정과 감각들을 마주하고 부딪혀보고 싶어요. 그것을 잘 흘려보낼 수 있는지 제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하고 설령 그러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워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두려운 감정이 들면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걸 배우게 될까 하고요.     


메리 님, 건강이 우선입니다.


늘 건강 챙기시면서 또 내일로 향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봅니다.     

그럼 늦은 답장이지만 또 이렇게 마음을 전해봅니다.     

6월의 어느 날, 새벽에.


두루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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