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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Dec 24. 2023

베지밀비





  순간에 최선을 다하다가도 잘 살고 있는 걸까 자주 멍해지는 요즘이다. 지난 일주일은 인스타그램을 열지 않고 지냈다.

  할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먹을 것은 잘 드시고 있냐고, 뭐 좀 보내드릴까 물었는데 ‘눈이 많이 와서 뭐 사러 가기 귀찮았다’는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전화를 끊고 부랴부랴 쿠팡에서 이것저것 장바구니를 채웠다. 급할 것 없는데 조급한 마음이 되었다.

<봉성으로 보낸 것>

- 베지밀비 : 할머니의 최애 두유. 다른 몸에 좋은 것들이 더 많겠지만 우리 할머니는 달달한 베지밀비를 고집하신다.

- 센베 과자 : 지난번에 드시고 싶다기에 한번 보내드렸더니 좋아하셨다.  

- 멸치쌀국수 : 밀가루는 좋지 않은데 국물이 먹고 싶어서 라면을 사 드셨다기에.  

- 설기 : 할머니는 떡을 좋아하시는데 이가 안 좋아서 쫄깃하거나 콩/팥/깨 등이 들어간 것은 못 드신다. 입에 넣어두면 녹는 떡. 설기를 골랐다.

- 물김치 : 전에 할머니가 시원한 물김치를 먹고 싶다고 하셨다. 여러 종류로 보내드렸었는데 시원하고 맛이 좋다고 하셨다. 이번에는 김장을 하지 않으셨다 한다.

- 초코파이 카스타드 : 있으면 든든하니까

- 미역국/사골국/육개장 : 비비고 레토르트..지만 따뜻하게 드시면 좋으니까

  보내는 목록의 기준은 단순했다. 이가 안 좋으시니 부드러운 식품일 것, 보관/개봉/조리가 쉬운 식품일 것. 그리고 추운 날씨에 따뜻한 국물이 많이 생각나니까 그런 종류로 좀 더 챙겨 넣었다.

  할머니는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이미 틀니를 하고 계셨는데 ‘더 젊었을 적에 치과 의사가 추천하는 대로 치료를 했더라면 이 고생을 안 했을 텐데 그때는 돈 몇 푼 아끼려고 그랬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때면 나는 그저 듣고 또 들었다.

  쿠팡 배송이 한 세 번에 걸쳐 나눠 갔나 보다. 그저께 베지밀, 센베, 멸치칼국수를 받은 할머니가 신나게 전화를 하셨다.

“센베이 과자가 세 가지 모양이 있는데 하나는 펴진 거, 하나는 동글동글 말린 거… 생강 맛이 나서 맛이 있다. 얼매나 많은동, 내년 봄까지 두고두고 먹겠다. 내가 잘 씹지는 못해도 입에 넣고 있으면 스 녹으니까. 니는 이거 먹어봤나? 여기는 이제 이런 걸 안 갖다 놓는데 서울에는 파는가 보네.”

  아마 작은 박스 속에 한 겹 비닐에 투박하게 담겨 있었을 센베 과자. 그 과자를 두고 할머니는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여러 가지 소감을(?) 이야기하셨다. ㅋㅋ 그리고 멸치칼국수 한 그릇과 센베과자 조금을 드시고 나서 나에게 전화를 거는 거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음식을 먼저 드시고 나서 나한테 연락을 하셨다는 게 나는 왜인지 마음이 좋았다. 지금 꼭 해야 할 일을 했구나 싶었다.

  어제 아마 쿠팡에서 두세 번째 택배 묶음들이 갔을 테다. 오늘은 내가 먼저 연락을 드려보니 할머니는 조금 화가 나 있다.

“왜 그크루 많이 보내노. 돈을 애껴쓰지 왜 그래 정신없이 쓰노.”

  마침 전화도 지지직 잘 안 들렸다. 예상치 못하게 혼나고 통화가 종료됐다.

  할머니가 내 냉장고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고 어마어마한 양의 김치를 보냈을 때, 박스 한가득 농작물을 채워 보냈을 때, 고마운 건 둘째 치고 ‘아 언제 이거 다 처리하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곧 다른 일을 미루고 앉아 옥수수를 까고 찌면서, 팔뚝만 한 크기라 에어프라이어에 들어가지도 않는 희한한 고구마를 댕강 잘라 구우면서, 인생 처음 말린 대추에 구멍을 내 차를 끓이면서 생각했다. ‘버리는 것 없이 다 먹어야지.’ 고맙고 미안해서 그 마음을 버릴 수가 없어서 귀찮다고 착각했던 거다.

  어쨌든 오늘은 돈을 정신없이 쓴다고 혼났지만 곧 할머니가 슬그머니 그 박스들을 열어 보시겠지. 맛있게 드시고 또 ‘추워서 뭘 사러 가기가 귀찮다’ 말해 주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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