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어진 경계로 누군가의 손을 붙들고 싶다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by 혜성

"내가 두른 장벽을 내려놓고, 그냥, 허물어진 경계로 누군가의 손을 붙들고 싶다."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문학과지성사, 2025) 중 작가의 말(294쪽)


이렇게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제목이라니, '멸망'이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는 단어였던가.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4)에서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제목을 보며 내뱉은 질문이었습니다. 게다가 긴 제목마저 의아했습니다. 그전 해 작가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수상작품의 제목이 단 한 글자 "녹"이어서 그 대비가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녹이 녹이 슬다의 녹인지 노크knock의 녹인지 초록의 녹인지 읽기 전 많은 상상을 했었더랬죠. 실은 직업병이 발동해 내가 모르는 녹이 뭔가 싶어 남몰래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봤습니다.)


현대판 계급을 포함해 다종한 층위의 관계성을 가마니처럼 짜놓은 <녹>을 읽고 '공현진'이라는 작가를 단박에 머리에 새겼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작품이 수록된 책들을 찾아 읽었고요.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그런 탐색 중에 만난 작품입니다.


"곽주호와 문희주는 성인 기초 수영반 꼴찌였다."라는 첫 문장부터 시작해 소설은 중간에 멈출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으로 저를 레인 끝까지 이끌었습니다. 끌고 간 동력은, 돌아보니 '다정함'이었습니다. '어차피', '멸망' 등의 단어가 풍기는 비관과 자조와는 백팔십도 다른 '어깨(와)동무'였죠.

KakaoTalk_20250704_232509448_01.jpg

세상을 대하는, 사람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자조와 비관이 있을 수 없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멸망의 순간에서조차 손을 내밀거나 내민 손을 잡을 믿음과 애정을 지닌 사람이니까요.


정말? 의심이 든다면 동명의 소설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로 확인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채로운 색깔의 여덟 편의 작품이 무엇을 향하는지를요.

KakaoTalk_20250704_232813075.jpg

"내가 두른 장벽을 내려놓고, 그냥, 허물어진 경계로 누군가의 손을 붙들고 싶다."는 작가의 다정함을 암흑 속에서 진실로 붙들고 싶습니다. 제가 만들려는 모든 책의 페이지에 페이지숫자처럼 넣고 싶습니다.


#편집자의독서노트 #책속한문장 #공현진 #어차피세상은멸망할텐데 #젊은작가상 #첫소설집 #작가의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름다움이 목적이 되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