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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Apr 03. 2023

뉴질랜드산 화이트와인

한 병을 다 마신 다음 날

어제 뉴질랜드산 화이트와인(스토커처럼 따라다니던 와인매장 전담직원이 추천했다. 뭐지? 따라다니면서도 얼굴엔 웃음기라곤 없이 귀찮아하는 표정이란?)을 한 병 다 마셨다. 마시면서는 취하는 느낌이 없고 하도 맛있어서 기분만 좋았는데, 눈 떠 보니 침대 위였다.      


새벽 4시 30분. 화장실이 급했고, 많은 양을 배출했고, 양치하지 않고 자서 혓바닥과 입천장이 딱 달라붙어 입을 벌릴 수도 없는 텁텁한 상태에 불쾌했고, 둘째는 옆에서 자면서 숨소리를 크게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눈이 감기기 전 분명 나는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고 있었고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무엇을 먹었더라? 먹지 않아 떠오르지 않는 것인지 먹고도 기억에서 지워진 것인지 불분명했다. 간장 비빔면을 남편과 먹고(오후 4시였던가?), 살짝 부족해서 만두를 쪄서 김치만두 두 개와 고기만두 두 개를 먹었고, 축구를 하고 들어와 허기진 첫째에게 연어덮밥을 만들어 주고(ft. 남편 미역국: 진짜 맛있어. 맨날 먹고 싶어.), 나는 만두의 느끼함을 지우려 화이트와인 한 잔을 따라 마시고 있었고, 둘째가 오기까지 한두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남편은 산책을 하러 나갔고, 산책하는 사람에게 와인을 두 잔째 마시는 사람은 무려 세 번씩이나 전화를 걸어서 마트에 들러 사야 할 추가 목록을 말했다. 김치는 비싸서 도저히 사라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 내가 좋아하는 김치를 살 때 나는 왜 그리 망설이는가. 같은 값으로 와인을 살 때는 설렘과 씨름하면서.      


여튼 남편이 돌아왔고, 7시 반쯤 둘째가 들어왔다. 나는 그때 티비를 보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이미 취한 건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에 없다. 둘째가 다행히 배가 고파서 그가 손을 씻는 사이에 광어+연어 덮밥을 준비했다. 들기름을 듬뿍 쳤고, 초고추장도 충분히 넣었다. 야채가 상당히 많은 편이었는데 깨끗이 먹어줘서 고마, 아니 흐뭇했, 분명 고마웠을 것이다. 뻑뻑할 거라고, 같이 먹으면 진짜 조화롭다고 하며 떠준 미역국도 둘째는 중간에 한 번 끊긴 했지만 마지막까지 다 먹었다. 아~ 크게 썰린 마늘 조각을 덜어내기 위해 나는 고운채를 사용했고, 그렇게 남은 마늘 조각과 남은 미역 건더기와 국물 우리는 용으로 희생된 커다란 다시마 조각을 나를 위한 그릇에 따로 남아 덮밥을 먹는 둘째를 보며 맛있게 먹었다.




아, 그런데, 뒤늦게 생각이 난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전혀 떠오르지 않았는데, 이후로는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뭐지? 물에 빠진 여인을 구해서 호흡이 느껴지지 않아 cpr을 진행했더니 고여 있던 물이 입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이 거북한 속 시원함은?      


나는 프라이팬에 음식을 달구는 남편의 오른편에 서 있었고, 도마 위에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몇 가닥 남지 않은 파 통에서 더 묵으면 맛도 신선도도 상할까 봐 다 꺼낸 파들이었다. 그것을 프라이팬에 모두 다 넣고 나는 다음 야채를 가져왔는데, 그것 또한 산 지 오래되어 냉장고 왼쪽 서랍에 일주일은 보관된 아이였다. 두 개 한 묶음이었는데, 하나는 내가 어딘가에 넣어 썼고, 나머지 하나였다. 길쭉하고 얇은 것들이 뭉쳐 있는----, 바로바로 팽이버섯. 다 넣고 싶었지만 남편은 너무 많다고 말려서 반절만 꽁지 자르고 집어넣었는데, 아쉬운 마음을 접고 남은 반절은 새송이버섯 남은 한 토막이 보관된 동그란 락앤락 통에 서로 의지가지하라고 집어넣어 뚜겅을 꽉 닫고 냉장고 속으로 돌려보냈다.      


아, 그들도 음식이 되고프지 않았을까. 더는 이 춥고 갑갑한 감옥 속에 있고 싶지 않다고 아우성이지 않았을까. 걱정 마라.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너희의 본분을 수행하도록 도울 테니.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편이 레인지의 불길로 익혔던 음식의 정체다. 그것은… 냉동실 왼쪽 칸에 모셔져 있던 우.삼.겹.이었던 것. 풍성한 파와 버섯으로 제법 요리 같은 형태를 획득한 음식을 남편은 그릇에 옮겼고, 나의 기억은 식탁에 옮겨진 디쉬에 나의 젓가락이 바삐 움직이며 주인의 입안으로 우삼겹볶음을 친절하게 전달해 준 장면으로 이동했다. 물론 나는 “오, 이것 참 고손한데?” “고소해서 계속 먹히네.” “진짜 잘 볶았다.” 따위의 감탄으로 나의 부지런한 사신, 젓가락과 남편 셰프를 격려하기를 잊지 않았다.




크윽. 나는 아이들 식사를 챙겨야 하는 역할도 잊지 않았고, 나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한 존재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누구와 어디서 어떻게 재미있게 놀다 들어왔는지 묻는 것도, 내일 아침에 무엇을 먹을 것인지 아이들에게 선주문을 받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잊은 건, 와인을 먹더라도 두 잔 이상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아무리 맛있어도 계속 먹으면 아니아니아니되옵니다 꺽꺽), 두 잔 이상 마시면 그전에 먹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새로운 음식을 찾는다는 것(왜? 술은 안주를 필요로 하니까)(대체 우삼겹볶음은 왜 그렇게 고소했던가), 그렇게 먹고 나면 그전에 집밖으로 나갔던 살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와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로 착! 달라붙는다는 것, 과음은 양치를 생략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 것, 것…, 수많은 후회와 자책을 남긴다는 것, 아침에 일어나면 음주 중에 기억했던 것 전체를 잊고 깡통처럼 리셋된다는 것이다.      


아,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잊은 것들과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처럼 남겨진 지저분한 기억의 조각들 사이에서 입안도 머리도 텁텁했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어진 물, 아니 마셔버린 와인인 것을. 나는 세수를 했고, 양치를 했고, 내가 차려주지 않아 스스로 아침을 차리는 첫째의 어이없어하는 눈초리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로 받아냈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잘 다녀오라 인사했고, 자리를 바꾸는 날이라고 일찍 나가는 둘째에게도 주급 용돈을 반가운 인사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커피를 내려 마시며 반성문을 쓴다.      


괜찮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몸무게가 늘어 있으면 어때, 빼면 되지. 얼굴이 부어 있으면 어때, 사람들은 너의 부어 있는 얼굴이 원래의 네 얼굴이라 생각한다니까. 기억이 좀 안 나면 어때, 요즘 넌 맨정신일 때도 지금 뭘 하려고 했더라? 하면서 묻곤 하잖아. 밖에서 안 마신 게 천만다행이다. 집 안에선 괜찮아. 괜찮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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