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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Jun 04. 2024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내 인생의 칼자루는 내가 쥐고 있소

#해운대_모래_축제, #그랜드_미술관, #축제는_끝났어도, #전시는_6월_9일까지


축제는 끝났지만, 모래 조각 작품들은 축제 기간과 무관하다는 듯 위풍도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모래로 만나는 그랜드 미술관’이라는 테마 아래 이집트 아브심벨 신전, <최후의 만찬>, <아담의 창조>, <비너스의 탄생> 등이 모래로 빚어져 있었다.

너무 고독해서 위대한걸.


태양과 짭짤한 습기와 바람. 이 피할 수 없는 자연 속에서 모래 작가들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찰나의 물질을 정직이라는 도구 하나로 단단하게 세워 올렸다. 인간이 나약하지 않은 이유는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겠다는 집념 때문이리라.


품이 세워진 오른쪽 끝까지 가서 되돌아오다가 한 작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멈춰 서서 작품 소개 팻말 내용까지 눈에 담았다. 이곳에 세워지기까지 나이는 더 먹었을 터인데, 그래서 좀 더 늙어 보여야 마땅한데, 훨씬 더 귀엽게 보이는 이 주인공은 다비드였다. 일리야라는 작가가 만든 이 작품의 작품명은 ‘I’m so heavy David’라고 한다. 어느새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현대인의 질병인 비만을 앓고 있는 데이비드.

나는 드라마 <히어로는 아닙니다만>의 복동희를 떠올렸다.


#초능력_복인가_저주인가, #현대인의_질병은_초초능력


복씨 집안 사람들은 각자 하나씩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복만흠은 예지몽을 꾸고, 아들 복귀주는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있고, 딸 복동희는 날 수 있다. 복권 당첨 번호, 주식의 흐름 등을 보여준 예지몽 덕분에 복씨 집안은 고립된 상태에서도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들의 초능력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현대인의 질병이 초능력까지 무력하게 만들 만큼 그들을 강력하게 지배했기 때문이다.

복만흠은 불면증, 복귀주는 우울증, 복동희는 비만에 걸렸다. 잠을 자지 못하니 꿈을 꿀 수 없고, 우울은 행복을 삼켜버려 과거로 돌아갈 이유 또한 사라졌으며, 10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는 덤벨과 같다.

옆구리 터진 쌀자루처럼 자꾸만 돈이 새나가는 복씨 집안의 마지막 재산을 노리고 한 가족이 접근한다. 백일홍 무리. 일홍의 딸 그레이스는 복동희가 관리하는 헬스장 트레이너로 취직을 한 뒤 복동희의 약혼남을 유혹하는 미션을 수행 중이다. 박만흠이 아들과 딸 중 먼저 결혼하는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백일홍의 타깃은 복귀주.


그레이스는 복동희를 유인해 그녀의 약혼남과 호텔 방 앞에서 키스하는 장면을 보게 한다. 약혼남과 파혼을 하게 하려는 일종의 덫이었다. 하지만 계획과 달리 복동희는 약혼남에게 달려들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해버린다. 어이가 없어진 그레이스는 다음 날 헬스장에서 복동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동희의 가슴에 분노를 일으키게 하려고 불쏘시개로 건드린다.


그런데 동희는 이번에도 걸려들지 않는다. 약혼남이 나쁜 놈이라고 모함하는 그레이스에게 동희는 이렇게 일갈한다.


복동희: 우리 사이가 흔들린 건 내 탓이야. 내가 나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서.


그레이스: 몸만 엑스라지가 아니라, 마음도 엑스라지 대인배네.

근데 그렇게 자책하는 거,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복동희: 모든 일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거, 그게 자존감을 줘.

내 인생 칼자루를 내가 쥐는 거라고.


#자존감의_진짜_정의, #자책에_대한_새로운_해석

#자존감과_자책의_상관관계


아, 나는 복동희에게 완전히 빠졌다.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돌려 봤다. 자존감이 그런 거야?


나는 늘 나를 탓했다.

그때 내가 선물을 줄 때 더 신중했어야 해.

칭찬을 할 때 다른 식으로 말할걸 그랬나?

내가 좋은 일을 하고도 그 일을 잘한 게 맞는지 돌려보기가 수십 번.

과거를 되돌리고 싶었다. 내 성격을 내다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 없듯(과거에 돌아갈 수 있는 복귀주조차 과거를 되돌릴 수 없어 우울증에 걸렸다), 성격을 버리는 일도 불가능하다.


나는 스스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내 자신을 다시 자책했다.


그런데!

복동희는 다르게 말했다.

자책이 자존감을 준다고.

모든 일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칼자루를 내가 쥐는 거라고.

너무 멋진 해석 아닌가.


다른 사람과 상황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내가 나를 미워하거나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나에 대한 내 기대가 크다는 말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 비겁하게 상황 탓을 하지 않겠다는 자존심, 결국 자책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인생 칼자루를 쥐고 오늘도 칼날을 정성스레 간다.


#드라마도_6월_9일이_마지막, #모래조각_전시와_히어로는_같은_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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