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글(2024년 8월 2일 게시글-“고골 <외투>: 어느 작은 인간의 소박한 복수”)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건 작은 인간은 존재합니다. 걸리적거리는 파리 한 마리보다 관심을 받지 못하는 작은 인간. 대체 ‘작음’은 어디에서 연유할까요? 고골은 그 문제를 당시의 관료사회에서 찾았던 것 같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사람의 작고 크고를 결정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작은 인간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2. 작은 인간이 발생하는 연유는 시대와 사회마다 다르다.
3. 150여 년 전 러시아 사회에서 작은 인간이 발생한 원인은 관료제도였다(라고 고골은 판단했다).
3번에 대한 근거로 저는 <외투> 속 한 장면을 가져오기도 했지요.
북방의 혹한은 … 관리들의 코를 사정없이 강력하고 매섭게 후려치기 시작한다. 고위 관리들마저 혹한으로 이마가 아프고 눈물이 질금거리는 그 시각, 가엾은 9등 문관들은 의지할 데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되고 마는 것이다. … 외투 등허리와 어깨 부분 몇 군데가 무명처럼 닳아 있음 … 천은 속이 비칠 정도로 해졌고 안감은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81~82)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닳아빠진 외투를 ‘덮고’ 있는 가엾은 9등 문관이라고 고골은 묘사했습니다. 직급이 낮을수록 그 사람이 가진 돈과 명예도 보잘것없습니다. 인간이 누려야 할 삶의 질은커녕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오늘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무엇이 인간의 크기-작은 인간, 큰 인간(?)-를 결정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김지연의 소설 <반려빚>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1. 돈 앞에서 0이 되는 그녀
정현은 돈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말았다. 어떤 때는 그런 마음이 정현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한없이 작아지고 싶다는 마음이… 부피도 질량도 거의 없다시피 한 아주 작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207~208)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관청의 위계질서 속에서 파리보다 못한 존재였는데, 2023년 대한민국에는 돈 앞에서 스스로 0이 되려 하는 정현이 살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정현의 직급이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직업인지조차 독자는 모릅니다. 그저 정현이 비혼이고, 여성이고, 혼자 살고, 2년 전에 여자친구가 떠났고, 그녀를 위해 빌린 은행 빚을 갚기 위해 지금도 꾸역꾸역 일터로 가고 있다는 사실만 알 뿐입니다. ‘돈’, 정확히는 ‘빚’이 정현 삶의 전부라는 사실이 독자인 우리가 알 수 있는, 아니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정보 같습니다.
150년 전 러시아에서는 ‘직급’이 전부였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돈’이 전부라고나 할까요. 직급이 좌우하는 삶과, 돈이 좌우하는 삶. 직급이 돈의 여부를 결정하는 사회와, 돈이 직급과 무관하거나 그 위에 존재하는 사회.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현상의 본질은 같아 보입니다. 작은 인간이 눈에 띄지 않는 미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요.
정현은 자신이 작아지고 작아진 끝에 차라리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아무것이 아니’고 싶어 합니다.
보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냐고요? 네, 정현에게는 빚이 있거든요. 무려 1억 6천만 원이라는. 8천만 원은 여자친구 서일과 함께 살려고 구한 집의 전세자금 대출액이고, 나머지는 서일이 네일숍을 차린다기에 빌려준 돈입니다. 정현은 그 돈을 은행에서 빌리면서도 서일에게 받을 돈이 아니라 둘이 함께 갚아 나가야 할 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일을 믿었고 사랑했으니까요.
하지만 서일은 3년 전에 빌린 그 돈을 갚지 못하고 2년 전에 떠났습니다. 돈과 사랑이 떠난 자리에 빚이 남았습니다. 빚은 한 사람의 삶을,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합니다. 정현은 절망합니다. 몹시 아픕니다.
사는 건 정말 쉽지 않아.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거든. 그냥 콱 죽어버릴까, 그게 가장 빠른 문제 해결 방법 아닐까? 하지만 누구 좋으라고… 씨발 누구 좋으라고 내가 죽어…. 내가 좋지 않을까? 지금 가장 힘든 건 나니까 내가 죽으면 내가 가장 좋지 않을까?(221)
서글픈 빚,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어려운 일상, 죽으면 그 누구보다 내가 좋은 지금, 여기. 그리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어제, 선택할 수도 있는 오늘, 선택할 수도 있을 내일.
2. 내가 너를 살게 해줄게
그런데 말이죠. 정현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지 못하게, 일상의 쳇바퀴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게 정현의 목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끈이 있었습니다. 가족이냐고요? 친구냐고요? 떠난 사랑이냐고요? 복수냐고요? 일이냐고요? 아닙니다. 그것은 꿈에서까지 나타나 자신과 함께하는 빚이었습니다.
그날 밤 꿈에서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줄을 한 쪽이 정현이고 목줄을 쥔 쪽이 반려빚이었다는 점이 좀 다르긴 했지만…. 정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카페에 잠깐 들를까? 반려빚은 정현이 꽤 가엽다는 듯이, 그러나 목줄을 쥔 자로서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집에 커피믹스 있잖아.(207)
네, 맞습니다. ‘반려빚’의 ‘반려’는 반려견, 반려묘 할 때 그 반려입니다. ‘반려’의 뜻은 ‘짝이 되는 동무’입니다. 정현의 친구 선주는 “서로 보듬어주고 보살펴줄 존재, 죽고 싶다 생각했다가도 내가 저거 때문에 못 죽지 그런 생각이 들게 해주는”(204) 게 반려자 혹은 반려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정현은 죽고 싶다가도 못 죽고 살아갑니다. 모두 반려빚 덕택입니다.
“정현은 다 때려치우고 싶다거나 죽고 싶다가도 그래도 저건 다 갚고 죽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빚진 것 없이 깨끗하게 죽고 싶었거든요. 가족들에게 자신의 빚이 알려지며 변변치 못한 사람이 되는 건 죽기보다 싫었으니까요. 그러니 “빚이야말로 정현이 잘 돌보고 보살펴 임종에 이르는 순간까지 지켜봐야 할 그 무엇”(206)이었습니다.
물론 서일 때문에 진 빚이라 정현에게 빚은 서일의 대리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빚을 온몸으로 품고 서일에 대한 질긴 그리움과 미움을 욕처럼 잘근잘근 씹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리하여 서일에게 어느 날 갑자기 원금만큼의 돈을 계좌로 돌려받았을 때, 그 돈으로 완전히 대출 상환을 해버렸을 때, 그래서 몹시도 후련함을 만끽했을 때, 정현은 어느 밤 반려빚이 떠나는 꿈을 꾸며 마침내 자신이 0이 된 기분을 느꼈을지 모릅니다.
3. 후련하지도 가벼워지지도 않는, 0
돈 앞에서 0이 되고 싶은 마음과 빚이 사라지자 정말 0이 된 기분. 이 상황과 감정은 매우 모순적입니다. 빚을 갚고 자유로워졌는데 존재감이 사라지다니요. 정현이 느낀 0의 기분은 무게가 나가지 않을 만큼 가벼워져서 훨훨 날아갈 것 같은 상태와도 다릅니다. 질기게도 나를 속박하면서 지금껏 나를 지탱했던 고무줄이 스르르 풀렸습니다. 그러자 고무줄이 당기는 힘과 똑같이 작용했던 저항과 긴장의 힘도 스르르 풀립니다. 정현이 느꼈던 모순의 실체는 웃프게도 작용-반작용이라는 과학의 원리를 담고 있었을지도요.
<외투>에서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앞으로 갖게 될 새 외투를 상상하며 그렇지 않아도 얇은 허리띠를 즐겁게 졸라매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때 그는 “마치 결혼이라도 한 것처럼,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 곁에 있으며, 어여쁜 여자친구가 평생의 반려자가 되어주기로 한 것처럼, 그의 존재 자체가 어쩐지 더 충만해졌”다고 했습니다. “그 여자친구란 다름 아닌, 두툼한 솜을 넣고 닳을 염려 없는 튼튼한 안감을 댄 바로 그 외투였”지요.(91) 그에게 새 외투는 지금의 허름한 삶이 더 허름해지는 대가로 얻을, 나머지 인생의 총체 같은 거였습니다. 그러니 그 외투가 강탈당했을 때 삶을 붙잡을 힘과 의지마저 도둑맞았을 것입니다.
분위기는 다르지만, <반려빚>에서 정현에게 '빚'은 아카키예비치에게 외투가 갖는 힘과 동일합니다. 그걸 '갚기' 위해(아카키예비치에게는 ‘갖기’ 위해) 삶이 더욱 빈곤하고 허름해지더라도 삶이라는 끈을 질기게 부여잡을 힘이 바로 그 빚이었다는 점에서요.
직급이 전부인 사회와, 돈이 전부인 사회. 전자의 사회에서 직급이 낮아 가련한 ‘영원한 9등 문관’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삶을 지탱했고, 후자의 사회에서 돈 대신 빚만 많은 정현은 빚을 갚기 위해 삶을 지탱했습니다. 그들에게 반려의 존재란 각각 ‘새 외투’와 ‘빚’이었습니다. 가져야 하는 플러스와 없애야 하는 마이너스. 속성은 다르지만 그걸 위해 지금의 삶이 더욱 곤궁해진다는 차원에서는 동질적인 무엇. 그럼에도 살아가게 만드는 위력이 있기에 반려의 존재.
두 소설 모두 한 사회에서 그 사회가 낳은 작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 보입니다. 그 삶이 풍자와 과장이 아니라 사실로 다가오기에 가볍게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작은 인간이 주인공 한 명이 아니라 별처럼 많은 것을 알기에 쓰라립니다. 작은 별들이 어두운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납니다. 어둠 속 작은 별들이 뿜어내는 빛의 세계. 그 광경을 이렇게 담담하게 그려낸 두 소설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일러두기
김지연의 <반려빚>은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4) 201~229쪽에, <외투>는 니콜라이 고골 《코·외투·광인일기·감찰관》(이기주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73~113쪽에 수록되어 있다. 괄호 속 숫자는 위 책에서 인용한 페이지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