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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성 Aug 23. 2024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과의 사투 뒤에 남은 것

톨스토이가 묻는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소

죽음을 곁에 둔 한 남자의 삶

서른다섯 살에 첫아이를 본 남자가 있습니다. 인기 작가였고, 몇 년 뒤에는 대하장편소설(<전쟁과 평화>)로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사랑하는 부인과 귀여운 자식, 사회적 명성과 풍족한 살림.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데 완벽한 성공의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이는 그 무렵부터 남자는 삶에 대한 회의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가 마흔한 살 때입니다.


남자는 죽음이 목전에 왔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죽음과 대면했(다고 믿었)습니다. 그의 염세주의는 해가 가도 나아질 줄 몰랐고, 머리의 통증은 정신의 통증을 칭하는 다른 이름이었죠. 이제 그의 작품에는 고통과 죽음과 허무가 담깁니다. 놀랍도록 찬란한 아름다움을 그리면서도, 그것이 예견된 죽음 앞에서 그러므로 얼마나 비참한지를 묘파합니다(<안나 카레니나>). 썩어 짓이겨질 장미잎의 화사함, 빛날수록 소멸이 분명해 서러운 별, 죽음의 그림자일 뿐인 삶.


남자는 살아 있는 지금을,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의 이면으로 생각했습니다. 뒤집히면 끝나고 마는 딱지치기처럼요.


즐기는 삶이 아니라 견디는 삶이었습니다. 삶 다음에 죽음이 있지 않고, 죽음 앞에 삶이 있었습니다. 남자는 죽음이 자신에게 오고 있다고 했지만, 그래서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올까 봐 두려워했지만, 실은 남자 스스로 매일 죽음을 찾아가 그 집 앞에서 기다린 것입니다. 죽음이 제발 저 문을 열고 나와 자기를 발견하지 말라고 빌면서요. 애타게 애타게 빌면서요.      


그렇게 처절하게 빌어서일까요. 자신의 순간순간을 송두리째 바쳐 싸웠기 때문일까요. 흠, 죽음이 남자의 공포를 안쓰러워해서 보너스를 주었던 걸까요. 아니면, 남자가 무서워하는 모습이 가련하고 귀여워서 그냥 살려두고 재미 삼아 그 모습을 즐기고 싶었던 걸까요. 마흔한 살에 죽음이라는 환영과 싸우기 시작한 이 남자는 정확히 살아온 만큼 더 살았습니다. 원 플러스 원처럼 마흔한 살에 마흔한 해를 더 얻었습니다. 물론 보너스로 받은 마흔한 해 동안 남자는 그것을 선물로 생각지 못하고 수류탄처럼 품고 있었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왕 사는 거 죽음 따위 생각지 말고 그냥 호쾌하게 살았다면 오죽 좋았겠습니까.


물론 세상엔 완벽히 좋기만 한, 완벽히 나쁘기만 한 일은 없지요. 마흔한 해 동안 남자가 죽음과 동거동락하면서 낳은 작품들이 200년 동안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으니, 그의 죽음과의 사투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위대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여! 그토록 기다린 죽음 속에서 내내 평안하시기를.

    

톨스토이에게 죽음이란

네, 그 남자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입니다. 사실 저는 그의 교조주의적이고 대놓고 교훈을 주려는 직설 화법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말이야, 응? 혼자 다 하려고 하잖아, 응? 착한 심성을 갖고 베풀고 남을 도우며 살라고? 손에 흙을 묻히고 자연에 겸손하면서? 뭐, 그걸 누가 몰라서 못하나? 사람이니까 못할 수도 있는 거지, 참, 거 진짜, 작가라는 사람이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가지고 말이야, 정말 잔소리꾼이라니까.’ 뭐, 이런 반발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게도, 작품을 읽으면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죠. 그야말로 무릎을 꿇고 맙니다. ‘어쩜 저렇게 사람 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속속들이 알고 있지? 고뇌하고 비참해하는 순간이 어떤 건지 알고 저러나? 남의 속도 모르고 잔소리만 하는 줄 알았는데, 뭘까, 이 인간.’ 이런 의문이 생기곤 했습니다.


제 딴에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는데, 그 비밀의 열쇠를 하나 발견한 것 같습니다. 바로 톨스토이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그는 가진 것 많은 집안에서 온갖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고 자랐습니다. 부족할 것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악덕 중 하나가 편협함입니다. 세상을 단면으로만 이해하는 겁니다. 생존을 위해 삶과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처절함과 그걸 위해 부수적으로 지녀야만 하는 비굴함, 결연한 의지와 어쩔 수 없는 포기, 뜨거운 용기와 분노로 펄펄 끓는 도피, 연민과 냉정함…. 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도 만만하지도 않다는 냉정한 벽에 가진 자가 부딪히는 기회가 없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는 톨스토이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의 글들을 뭣도 모르는 사람이 늘어놓는 텅 빈 잔소리로 치부했을지도요. 그게 제 편협함에서 나온 것인 줄 뻔히 알면서도요.


그런데 그의 생존을 위협했던 건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습니다. 추측하건대 그게 꼭 배부른 자의 공상은 아닙니다. 그가 성장하면서 또 성인이 되어서도 자주 보아왔던 건 죽음이었습니다. 전쟁을 겪기도 했고 지금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보편적 이유를 떠나 아주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형과 자신의 다섯 아이를 잃었습니다. 죽음은 그에게 환영이 아니라 실체로서, 삶 속에 존재했습니다.


제가 주목하는 건 그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보아온 작가들의 사망입니다. 그가 9살 때 푸시킨이 사망했고(1837년), 13살 때 레르몬토프(1841년)가, 24살에는 고골(1852년)이 사망했습니다. 50대에 들어서 1881년과 1883년에는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마저 연달아 세상을 떠났으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장수 인생이 정작 본인에게는 몹쓸 짓을 했지요.


가족, 친구, 문인들의 죽음. 그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자신의 일’이었을 겁니다. 어차피 죽는데 받아들이라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충고의 말이 전쟁터에 나가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는 사람에게, 어차피 죽으니 마음이나 편안히 먹으라는 소리와 같을 수 있겠군요.      

      

평범한 이름, 특별한 죽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 그것을 아예 대놓고 말하는 소설입니다. 소설 제목이 신문 부고도 아니고 긴장감 하나 없이 아무개가 죽었다고 알리다니요.


이 작품은 1886년에 출간되었지만, 1882년에 톨스토이가 아내에게 주는 선물로 집필하였습니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는 실제 있었던 인물을 모델로 했습니다. 고향 근처 도시에 이반 일리치 메치니코프란 이름의 판사가 한창 일할 나이에 위암으로 죽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판결로 인해 오랜 유형 생활을 하게 된 불쌍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른 사람은 쉽게 유형 보내고 자신은 집에서 안락하게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사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담아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완성하였죠.


이반 일리치는 한 반에 두세 명은 있는 흔한 남자 이름입니다. 흔한 이름을 택했다는 것은 주인공의 의식, 태도, 결정이 보편적임을 암시합니다. 소설은 자타공인 성공한 인생을 살던 한 판사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세상을 뜨는 이야기입니다. 마흔한 살 무렵에요. 그는 능력 있고, 수완 좋고, 맵시 있게 차려입고, 예의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삶을 즐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사랑보다는 필요에 의해 한 결혼인지라 삐걱거림이 있었지만(물론 사랑해서 한 결혼도 삐걱거리겠지만) 그럴 때마다 그는 일에 몰두했고, 그럴수록 직장에서 인정받았고, 인정에 따른 경제적 대가는 삐걱대는 결혼생활에 기름칠을 해주었습니다.


뭐 하나 빠질 게 없는 삶, 그야말로 나이스였지요. 급작스러운 병에 걸리기 전까지는요.

 

도대체 왜 죽음은 나를 선택한 거지?

이반 일리치는 병에 걸린 걸 알았을 때, 그 병이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을 때, 병세가 갈수록 깊어져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도대체 왜 나에게 죽음이 찾아오는지’ 묻고 또 묻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나 계속해서 되짚어 봅니다.      


‘적어도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때는 설명이 가능하겠지. 하지만 나는 그것만은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어.’ 그는 자신의 삶이 모든 점에서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올바르고, 품위 있는 삶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스스로 이렇게 부인했다. ‘그런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136~137)     


아무리 생각해도 이반 일리치는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자신은 판사로서 이유 있는 죄에 대해서만 벌을 내렸는데, 의사들은 이유도 없이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왜 나일까, 이반 일리치는 숨도 못 쉽니다.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고통 끝에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고 위선적으로 살아오지 않았는지 반성합니다. 고통받는 자신과 별개로 아름답고 건강한 부인과 딸이 힌트가 됩니다.     


이반 일리치는 아내의 모습을 찬찬히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아내의 하얀 피부, 포동포동 살이 오른 몸, 깨끗하고 단정한 팔과 목, 윤기 흐르는 머리칼, 생기로 가득 찬 빛나는 두 눈, 그는 아내의 모든 것을 원망하듯 바라보았다.(119)

젊은 육체가 훤히 드러나도록 아름답게 치장을 한 딸이 안으로 들어왔다. 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보는 것은 그로선 고통이었다.(123)     


퀭한 병자와 활기 넘치는 아내와 딸의 대비는 선명합니다. 아내와 딸은 결혼 준비로 더 싱그럽고, 남편과 아빠의 죽음이 그 에너지를 멈추게 할 방해 요인이 되지 못하도록 차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척하는 가족의 가식에 이반 일리치는 더욱 절망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바로 저 가족들의 모습에서 거울처럼 보인다는 걸 깨닫습니다. 일도 가족도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편리한 수단으로써 활용했다는 것을요.      


그가 살아온 인생이 송두리째 잘못된 것일 수 있고, 어쩌면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자신의 일도, 삶을 살았던 방식도, 가족도 그리고 사교계와 직장에서 친분을 쌓은 사람들까지도 … 다 거짓일 수 있는 노릇이었다.(140)     


톨스토이는 상류층을 대표하는 이반 일리치 판사가 성찰 없이 세속의 욕망에 충실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말이 아닌 자의식으로 그것을 직시하라고 작품을 통해 명령하는지도요. 마치 죄인이 자신의 죄를 진술하듯이, 이반 일리치에게 자백의 돗자리를 깔아준 거죠. 이반 일리치가 잔인한 판사를 만났네요.

 

그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를 바 없으므로

얼마 전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책을 다시 펼쳐 읽었습니다. 거기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이반 일리치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이반 일리치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교훈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소설 속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앞두고 어린 시절 이후로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진실한 목적 없이 가식과 수단으로 가득했다고 깨달았습니다. “일의 과정”과 “길의 도중”에서 순수와 선함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요.


톨스토이가 보기에 상류층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돌아볼 기회가 적습니다. 온 삶을 뒤흔드는 일, 이를테면 죽음과 같은 막다른 벽에 부딪히는 일이 아니고서는요. 그래서 톨스토이는 한창 오르막을 오르는 이반에게 모든 이반 일리치들을 대표해서 죽음이라는 낭떠러지를 선물한 것 같습니다.     


꼭 죽음을 불러들이지 않더라도 순간순간 성찰하는 행위는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누군가에게 비난받을 만큼 그렇게 나쁠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고, 죽음이 삶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하고 그것이 찾아오는 시기는 랜덤일 뿐입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고 주어진 대로 정리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읽는 내내 반감보다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한 사람의 삶을 통사적으로 늘어놓았는데, 특별한 사건 없는 그 몇십 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내가 살면서 놓치고 있는 요소들을 남의 삶에서 엿보기 때문일 겁니다.


분명 사회적 성취를 이루었는데 그게 존경스럽지가 않고, 분명 축하할 결혼을 했는데 그게 부럽지가 않고, 분명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사람인데 그를 친구로 사귀고 싶은 생각까지는 들지 않습니다. 그만큼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반어와 부조리와 역설과 비난을 진지함과 레이어드해서 서술했습니다.


결말이 빤한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이 이토록 인상적으로 남는 것은 그게 결국 나이고 너이고 우리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일 겁니다. 내가 한 명의 이반 일리치이고, 나 또한 그렇게 후회와 자책과 원망과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을 거라고 느끼는. 과연 톨스토이입니다. 못을 박듯 톨스토이는 반어적으로 묻습니다. 그러니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겠냐고.     


다음 연재 글에서는 공현진의 단편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다룹니다. 아무개의 죽음이 아니라 이번에는 세상이 죽는답니다. 스케일이 커졌습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일지, 그 세상에도 이반 일리치들이 있을지 만나보겠습니다.     


일러두기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27~148쪽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괄호 속 숫자는 인용한 책의 쪽수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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