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것은 사랑
곽주호와 문희주는 성인 기초 수영반 꼴찌였다.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소설의 첫 문장은 이보다 더 선명하고 더 유용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하는지가 이 짧은 한 문장에 다 드러나니까요. 두 명의 주인공 이름을 알았고, 이름을 통해 성인 이성 두 명이 사건을 만들어낼 것이 예측되며, 장소는 수영장이고, ‘꼴찌’라는 위치가 사건을 일으키는 동력이 될 흥미로운 소재로 여겨집니다.
‘5W 1H’ 법칙 중에서 Who, What, Where, How 네 가지가 나왔으니 When과 Why만 있으면 완성이네요. 그중 When(시간 배경)은 ‘성인 기초 수영반’이라는 정보에서 ‘요즘’임이 충분히 드러나니 패스. 우리에게는 Why, 이유 찾기 미션만 남았습니다.
곽주호는 플라스틱 화분 받침대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다가 얼마 전부터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사업장에서 안전사고가 일어나 한 명의 직원이 사망한 뒤였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공장은 계속 돌아가는 상황에서 주호의 마음이 점점 가라앉고 주호의 세계가 무너졌습니다. 도시가 물에 잠기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수영을 배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문희주는 10년 교사생활을 했고, 그만둔 지 1년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우리 모두 물에 잠겨 죽는다는 말로 교육하자 근무하던 사립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퇴사 후 종이접기, 보자기 매듭 공예처럼 취미반 수업을 듣고 있고, 채식 요리를 배우고 있으며, 수영 기초반에도 등록했습니다.
곽주호와 문희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수영 기초반 맨 마지막 줄 꼴찌입니다. 실력이 늘지 않는데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연습을 합니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고, 몇십 년 뒤 도시가 물에 잠긴다는 다큐멘터리를 봤습니다. 죽고 싶다는 충동은 없는데, 살고 싶다고 강하게 갈망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많은 것을 합니다. 그들은 꼴찌로서 수영장 안 동지이고 수영장 밖에서는 떡볶이를 함께 먹는 친구입니다.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90)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가 병을 얻고 죽음의 순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느낀 것은 후회와 자책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그것이 알맹이 없는 한낱 겉치레였다고 생각합니다. 통증으로 몸이 고통스러울수록 건강한 가족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커졌습니다. 마음의 고통 또한 커지는 것이죠. 죽음이 발밑에서부터 타고 올라와 목구멍을 조여올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는 설정입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는 ‘삶’이 보편이고 ‘죽음’이 특수입니다. 즉, 죽음은 개인에게 찾아오고, 그 개인은 죽음이 왜 자신을 선택했을지를 고민합니다.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많은 것이 양분됩니다. 죽음에게 간택된 한 사람 vs 그렇지 않은 나머지 모두. 긴 삶 vs 한순간의 죽음. 의식 없이 흘러가는 맹탕의 장시간 vs 의식하며 맞이하는 밀도 있는 찰나. 이것이 톨스토이가 만들어낸 죽음의 이분법입니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자기 성찰적인 문제 = 죽음. 이런 공식이 만들어집니다.
150년이 지난 2023년에는 어떨까요.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동일하게 죽음을 다루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전제와 소설적 요소에서 많은 점이 다릅니다. 동일하나 다르다, 바로 이 미묘함 때문에 제가 두 소설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 먼저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은 이반 일리치 한 사람인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주인공은 곽주호와 문희주 두 사람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병을 얻은 순간부터 끝에 이를 때까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을 성찰하는 고독한 1인인데, 곽주호와 문희주는 다른 공간에서 살던 사람들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느껴서 비슷한 선택을 했고, 바로 그 선택으로 인해 같은 시기에 한 공간에서 만나 마음을 나누는 2인 1조가 됩니다.
“여기 오세요. 여기 자리 있어요.” 뒤쪽에서 불쑥 나타난 손에 채여 주호는 뒤로 끌려갔다. 그리하여 맨 뒷줄 멤버들이 확정되고 부동의 뒷줄이 완성되었다. 주호와 희주, 한 할머니와 할머니의 딸이 뒷줄 동지였다. (79)
· 이반 일리치는 사회적인 성공을 일궜고 가족이 있고 그런데 병에 걸려 손에 쥔 모든 것을 타의적으로 놓아야 하는 40대지만, 곽주호와 문희주는 자발적으로 사회생활을 그만두었고, 돈은 없지만 건강한 육체를 가졌고, 죽음과는 멀리 있는데 살고 싶다고 갈망하고, 30년에서 50년 뒤에 지구가 물에 잠긴다는 예측을 받아들이고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30대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오십 년 뒤, 빠르면 삼십 년 뒤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91)
·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이르는 동안 침대에서 외로웠지만(물론 게라심이 그에게 위안이 되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 정신적 교류는 없었습니다), 가라앉을 예정인 지구에서 그래도 더 살고 싶다고 갈망하는 두 사람은 나란히 함께합니다.
주호는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충동이나 갈망 없이도, 살고 싶다는 충동에 절실하게 시달렸다. 살고 싶다, 더욱 살고 싶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때로 장바구니를 든 희주 앞에서 흩뿌렸다. (90)
· 이반 일리치는 자기의 성공과 평판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곽주호와 문희주는 세상과 연결된 자신들을 인식하고, 책임감과 변화된 행동의 의무감을 갖습니다. 주위를 둘러보고 약한 사람들을 돕고 꿀벌의 사라짐과 지구 온난화를 자기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네가 왜 난리냐, 라는 말을 듣고 주호는 그러게, 내가 왜 난리일까, 싶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85)
꿀벌 무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체인처럼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고리 끝에 자신이 매달려 있다. 나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82)
·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곽주호와 문희주는 지구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합니다.
주호는 물속에 얼굴을 집어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주호는 잘 떠 있고 싶었다. 더 둥둥 떠 있고 싶었다. 주호는 수영장에 나와 종일 호흡법을 연습했다. (87)
· 이반 일리치는 자기 혼자 죽는 것을 억울하게 여겼지만, 문희주는 세상 사람들이 다 같이 물에 잠긴다는 상상에 위안을 얻습니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91)
삶도 죽음도 혼자였던 1인과, 삶도 죽음도 함께하려는 1조. 외로움과 성찰과 반성을 혼자 하는 1인과, 세상 속에서 자기 책임을 인식하고 모두를 위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안 하는 용기 있는 1조.
저는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한 명인 시대가 지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가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메멘토 모리에 대한 인식이 개인에서 인간 전체로 확장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늙어서가 아니라 젊고 어려도, 병이라는 구체적 계기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아프지 않아도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산타할아버지처럼 개인 맞춤형으로 집집마다 다른 선물을 가지고 들르지 않습니다. 너는 언제 죽고 나는 언제 죽는지 일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공통의 데드라인 앞에 모두가 놓였습니다. 죽음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집단의 문제가 된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 삶을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철학적인 문제에서 생존의 문제로 절박해졌습니다. 지구가 멸망해 가는 이때에 육식을 줄이고 소비를 줄여야 모두의 수명을 함께 늘릴 수 있습니다. 즐기는 스포츠 수영이 아니라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생존 수영이 필요합니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삶을 내려놓고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해보는 것이 개인에게 소중해집니다.
모두가 몇십 년 뒤에 함께 물에 빠진다. 이 대의명제 앞에서 곽주호와 문희주는 선택을 합니다. 자기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습니다. 적당히 힘을 주고 적당히 힘을 빼야 물에 떠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듯, 자신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숨 쉬는 법을 배웁니다. 너를 딛고 내가 일어서겠다는 용씀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신 차분하게 나란히 물살을 가르는 것만이 살길임을 깨닫습니다.
제목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첫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멸망해? 그럼 오늘을 막 살아. 즐겨!’ 이런 극단적 쾌락주의나 ‘세상이 멸망해? 아무것도 하지 마.’ 이런 극단적 회의주의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곽주호와 문희주는 어차피 세상이 멸망할 텐데도 멸망하는 세상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멸망하는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는 법을 배웁니다. 올바른 생각의 소유자들입니다. 정의로운 실천가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혼자였을 때는 외로웠습니다. 소수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어쩌다 우연히 만나게 되자 동지애를 느낍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서가 아닙니다. 1등과 꼴찌라는 세상의 기준을, 이기려는 노력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으로 뒤엎는 상식 없음이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뭔가 묘했습니다. 어떤 기분인가 했더니, 한겨울에 시멘트바닥에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모르는 사람이 손난로를 건네줘서 잠시 쥐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하나밖에 없는 손난로라 저는 빨갛게 언 손가락들로 쥐고 있던 그것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모르는 사이지만 추위에 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 그렇게 손난로가 한두 번 더 오가면서 식는 사이 마음은 따뜻해졌지요.
곽주호와 문희주는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작은 손난로를 보여줍니다. 어차피 멸망하는 세계 안에서 다투지 않습니다. 천천히 같이 갑니다. 갈 수 있는 만큼 갑니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은 끝까지 가볼래요? 아니요, 저는 안 갈래요. 왜 안가요. 희주와 주호는 실랑이를 한다. 희주가 먼저 간다. 주호가 뒤따른다. 물을 밀어내는 만큼 밀려가는 몸. 밀어내는 만큼의 무게. 딱 그만큼 두 사람은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만진다. 움켜쥔다. 갈 수 있는 만큼 간다. (98)
일러두기
공현진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는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24) 73~110쪽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괄호 속 숫자는 위 책에서 인용한 페이지를 뜻합니다.
사진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