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한국에 온 톨스토이들> 에필로그
열두 살에 만난 질문: 왜 살아 있느냐
초등 6학년 때였다. 지금처럼 여름과 가을 사이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 그때 입었던 갈색 줄무늬 7부 티셔츠가 기억난다. 그날은 시험공부를 한다고 독서실에 다니던 언니를 따라 독서실에 처음 갔던 날이다. 초등 6학년이 독서실에까지 가서 할 공부가 어딨겠는가. 자고로 언니들 하는 건 다 따라 해보고 싶은 게 동생들 맘이다.
그 독서실은 동네 목욕탕 위층에 있었다. 계단을 올라 입구에서 표를 끊고 독서실 안으로 들어갔다. 고요를 깨뜨리면 안 된다고 직감하며 조심조심 신발을 벗고 맨발을 독서실 바닥으로 옮겼다. 두세 발 걸었을까. 밝은 빛에 끌려 고개를 들었다. 내 작은 키보다 큰 독서실 책상막이들이 높은 허들처럼 빛을 순차적으로 막고 있었지만, 책상과 책상 사이 복도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왼편에서 조용한 빛이 살포시 내 발가락에 와닿았다. 버스정류장 쪽으로 통창이 나 있었다.
아! 독서실이 이런 곳이구나, 밝고 조용하고 창문으로 바깥도 바라볼 수 있고. 지금으로 치자면 카페의 창가 노트북 자리였다. 내 자리는 저기, 창문 앞이다! 신이 나 통창까지 재게 걸어서 창을 등진 끝자리 줄 책상 하나에 가방을 내려놨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몸을 돌려 곧바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적당히 뜨겁고 적당히 선선한 초가을 주말의 정오. 거리는 한산했고, 주말이라 버스가 뜨문뜨문 섰고,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도 많아야 두셋이었고, 떡 진 머리와 부스스 곱슬머리들이 츄리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목욕탕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섰다. 앉자마자 내가 빼꼼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목욕탕 수분과 사람들의 하품과 텁텁한 입냄새가 들어왔다. 그리고 기지개, 그것은 분명 나른한 여름의 낮잠을 깨우고 나오는 가을의 기지개 소리였다.
휴, 그때 내 가슴에 얼마나 큰 구멍이 났었는지. 나는 그 뻥 뚫려 헛헛한 마음을 어쩌지 못해 두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내 독서실 자리에서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목욕탕 앞 시멘트 바닥을 밟았다. 정류장에 승객 둘을 내려주고 방귀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출발하는 늙은 버스보다 세 걸음 앞서서 집 쪽으로 걸었다. 아까 독서실에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분출했던 뜨거운 질문 세례가 계속됐다. 바로 이것.
“너는 왜 살아 있느냐.”
사춘기의 시작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한 답을 알고 싶은 시기.
그날 독서실에서 두 시간을 앉아 있으면서 나는 저 질문에 테러를 당했다. 이런 식이었다.
Q: 너는 왜 사느냐?
A: 태어났으니까.
Q: 태어났으면 다 살아 있어야 하느냐.
A: 그게 무슨...?
Q: 네가 이 세상에 꼭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느냔 말이다.
A: 꼭 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Q: 꼭 있을 이유도 없는데, 왜 살고 있느냐.
A: 글쎄...
Q: 살 이유가 특별히 없으면 사라지면 되지 않겠냐.
A: 죽으라고?
Q: 삶에 답이 없다면 죽음에 답이 있지 않겠냐.
A: 죽음이 답이라고...?
질문은 “왜 사느냐”가 아니었다. “왜 살아 ‘있느냐’”였다. 네가 지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이유를 대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존재의 이유라.
초등 6학년의 나에게 불쑥 찾아온 질문 “왜 살아 있느냐”가 이후 내 의식을 죽 지배했기 때문인지, 내게 삶은 꽤 무겁게 느껴졌다. “너 왜 살아 있어?”라는 질문 안에 “너같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살아 있다니”, “네가 죽어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없을 텐데”, “네가 살아 있음은 낭비”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게 아닌지 쓸쓸하게 자문했다.
살아 있는 이유는 몰라도 그렇다고 죽는 방법도 모르니, 내 살아 있음이 쓸모있음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공부도, 봉사도, 업무도 나의 쓸모를 보여줘야 할 치열한 수단이었다. 무임승차라는 표현이 나풀거리는 원피스 자락에 어쩌다 묻을까 봐 조심했다.
사람답게, 나답게, 아름답게, 우리답게
질문이 깊숙이 파고든 그날부터 답을 찾는 심정으로 책을 펼쳤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데미안> <좁은 문> <장 크리스토프> 이런 유였는데, 내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이유’를 말해 주지는 않았다. 대신, 나처럼 살아 있음을 고민하는 주인공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렜다. 나보다 고민이 심각하고 나보다 슬픈 운명의 주인공들을 만나면 울었고 한동안 가슴이 아팠다.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사는 건 팍팍했지만, 주인공들을 만나는 일만은 즐거웠다. 내가 왜 사는지 물으면 머리가 아프고 시간이 더디 갔지만, 주인공들이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일을 지켜보면 시간이 빨리 흘렀다. 중학교 때는 특히 소설을 읽으며 새벽을 맞는 일이 잦았다.
소설을 읽으며 그 안에서 삶을 본다. 내가 겪지 않은 낯선 삶인데, 거기서 익숙한 고민을 발견한다. 이번 연재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 또한 그러하다.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숭고한 주인공들이 자기의 소중한 삶을 지켜 나간다. 삶에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은 많다. 나는 이번 연재에서 네 가지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사람답게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기.
계급과 성별과 인종과 장애 여부를 떠나 같은 사람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다. 그게 없을 때? 그 고통을 그린 것으로 두 작품을 골랐다. 톨스토이의 <무도회가 끝난 뒤>와 김남숙의 <파주>가 각각 19세기 러시아와 21세기 한국을 대표한다.
나답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나 그 자체로 살아가기.
모든 존재는 다르게 생겼다. 몸도 마음도. 그것을 개성이라 부른다. 개성에 올바른 개성과 그렇지 않은 개성이 없고, 좋은 개성과 나쁜 개성이 있을 리 없다. 그러므로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자유를 그리는 두 작품이 있다. 체호프의 <상자 속의 사나이>, 성해나의 <혼모노>.
아름답게
가진 것이 없다고 그 사람의 정신마저 후줄근하지는 않다. 사랑하는 일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타협하지 않는 자존심이 있고 비굴하지 않은 책임감이 있다. 없이 살아도 삶에 대한 자세는 숭고하다. 그걸 작은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은 두 편의 작품을 통해 확인했다. 고골의 <외투>와 김지연의 <반려빚>.
우리답게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할 때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죽음이 썰물처럼 밀려올 때일수록 더욱 그렇다. 손잡고 있으면 죽음을 잊을 수도 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걸친 옷, 명함, 주소 등은 구분에 의미가 없다. 계급장 다 떼고 그저 동지로서 어깨 마주할 때 힘이 생긴다.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과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시공간을 달리해서도 죽음 앞에서 성찰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은 작품으로 꼽아보았다.
19세기 러시아 단편소설과 21세기 한국 단편소설을 잇는 작업은 재미있었다. 네 개의 쌍으로 그쳤지만 더 많은 쌍들을 앞으로 찾아주겠다는 각오를 했다. 시대가 달라지면서 가치관과 상식이 변화했음을 알게 되었다. 보편적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 상이해서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는 일이 흥미로웠다. 작가는 시대의 산물이고, 작품은 작가의 몸에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작품 또한 그 시대의 세포다. 두 개의 세포를 가져와서 그것을 이루는 DNA를 비교하는 느낌이다.
공통의 것과 차이 나는 것. 보편성과 특수성. 일반성과 개별성. 긍정적 의미의 진보와 퇴보하면 좋을 부정적 일관됨. 다른 것들끼리의 공존은 이번 연재에서조차 힘을 발휘했다.
한 회의 글을 다 써서 브런치에 올리는 날이면 가루로 부서져 있던 내가 완성된 형태로 서 있는 느낌이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나를 이루는 가루라면 그 글자들이 의미 있는 단어와 문장과 문단과 한 편의 글로 조합될 때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온전해진다.
“너는 왜 살아 있느냐.”
굳이 답할 필요가 없는 질문이다. 애초에 답이 정해지지 않은 질문이다. 질문이 턱없이 오만하다. 질문과 별개로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하나의 글을 완성할 때 내가 제대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것. 그러므로 계속 숨 쉬기 위해 글을 쓸 거라는 것. 글을 쓰기 위해 읽을 거라는 것. 19세기 러시아 소설이든 21세기 한국의 소설이든 나를 숨 쉬게 하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 그것이 소설이 살아 있는 이유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