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네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석혜탁 칼럼니스트 May 27. 2017

<커피카피아가씨>를 들으며, <82년생 김지영>을 읽다

여성의 지위, 나아졌다 한들 기저효과로 인한 착시현상이 아닐까

<커피카피아가씨>를 들으며, <82년생 김지영>을 읽다

- 여성의 지위, 나아졌다 한들 기저효과로 인한 착시현상이 아닐까.


“소개 들어갈게 이름은 김커피 나이는 스물넷

사진과 실물이 좀 다른 XX염색체

김커피는 서울 소재 여자 대학생

이제부터 그녀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볼게

대학교를 졸업 후 취업서류 면접 광탈

외모도 스펙이란 걸 깨닫고 난 후 움직였지 당장

시원히 깎아버렸지 옛 얼굴 갖다 버렸지

엄만 울고 커피도 울었지 왜 울음이 나왔는지 몰라도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참 빡세다는 생각”

-매드 클라운 <커피카피아가씨>


매드 클라운의 노래 속 ‘김커피’는 최근 읽은 책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김지영.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기 참 빡세다는 생각”은 김커피와 김지영 둘 다 공유하고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김지영 씨는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탑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 기사님이 던지는 말이 가관입니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깐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들어가도 위의 택시 기사처럼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을 적잖이 마주해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도 심심찮게 접하게 됩니다. 


“사랑 받는 여직원 되려면 귀여운 여직원 되려면 

뒤돌아 쓸개를 씹을지언정 자존심 눌러요”

-매드 클라운 <커피카피아가씨> 

회사에는 ‘유능한 직원’이 필요한 것이 마땅한데, ‘사랑 받는 여직원’이나 ‘귀여운 여직원’ 따위를 요구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사고수준은 지극히 후진적입니다. 여성들은 한번도 원한 적 없는 그 유치한 타이틀(‘사랑 받는 여직원’, ‘귀여운 여직원’)을 아직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홍보대행사에 다니는 김지영 씨는 한 중견기업 홍보부와 회식을 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홍보부장은 외모에 대한 칭찬과 충고를 늘어놓고, 남자 친구가 있는지 물으며 원래 골키퍼가 있어야 골 넣을 맛이 난다는 저열한 농을 지껄입니다. 한 번도 안 해본 여자는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여자는 없다는 망발까지 내뱉으며 계속 술을 강권합니다.


그 부장은 갑자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며 말합니다.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성희롱을 일삼던 그도 한편으로는 딸 바보 아버지였습니다. 원래 좋은 사람이었을까요?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은...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이 덜떨어진 아저씨는 자기 딸도 ‘요 앞 대학’ 졸업 후 김지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나 봅니다.



“이제부터 그녀의 하루를 조금만 들여다볼게

포부 가득 김커피 반짝이는 사원증 달고 

설레는 가슴 들뜨는 마음 즐기며 신나게 출근 중

당당히 걸으며 다짐하죠 

열심히 능력을 펼치며 나도 될 거야 

내 분야 내 일에 인정받는 아름다운 프로

하지만 부장님 가라사대 순종적인 여자가 돼 

싫어도 아닌 척 알아도 모른 척 나서면 꼴불견 돼”

- 매드 클라운 <커피카피아가씨>


“내 분야 내 일에 인정받는 아름다운 프로”가 되고자 노력했던 김지영 씨. 

하지만 출산이 다가오자 퇴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일하는 게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듯,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것도 일에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다.”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일에 열정이 없어서”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고 있는 게 아닌 김지영 씨. 


어느 날 벤치에 앉아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며 오랜만의 여유를 잠깐이나마 느끼고 있던 와중에 김지영 씨를 흘끔 보는 무리들의 대화를 듣게 됩니다.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소설이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 김지영 씨의 딸 지원이는 유모차에 잠들어 있어서 ‘맘충’이라는 극언을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커피카피아가씨>를 듣고,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어머니와 제 여자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어머니 때보다 82년생 김지영 씨의 상황은 나아졌는가, 김지영 씨보다 제 여자친구는 더욱 행복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자문해보았습니다. 나아졌다 한들 기저효과로 인한 착시현상이 아닐까. 


상대적 강자였던 남성으로서 제 주위 김지영들에 대하여 너무도 몰랐다는 자책에 고개를 들기가 어렵습니다. 


92년생, 02년생 12년생 김지영들은 앞으로 ‘맘충’ 따위의 소리를 듣지 않는 정상적인 세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자는 왜 부자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