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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혜탁 칼럼니스트 Dec 28. 2017

가학과 피학의 결합, 중국 문혁의 토양

다이허우잉(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고

가학과 피학의 결합, 중국 문혁의 토양

- 다이허우잉(戴厚英)의 <사람아 아, 사람아>를 읽고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망각된 휴머니즘의 가치를 재조명했다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이 주장에 반기를 들 생각은 없으나, 소설의 의미를 ‘휴머니즘’이란 단어 안에 묶어두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아울러 작품에 대한 기존의 감상이 주로 쑨위에와 허징후 사이의 사랑에 치우쳐 있는 감도 없지 않다.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자오젼후안은 소문난 미인이자 상냥하며 남을 배려할 줄도 아는 아내인 펑란씨앙에게 무정하기만 하다. 펑란씨앙만 없었다면 쑨위에를 잃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그는 차가운 태도와 날이 바짝 선 언어로 아내에게 툭하면 상처를 준다.



“당신이 정말로 보내고 싶어한다면 가지! (…) 설령 그녀(쑨위에)에게 내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상관없어.”


이런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자오젼후안은 부인을 ‘분별없는 여자’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이런 야박한 모습이야말로 더더욱 분별없는 작태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소리를 죽여 우는 것 외에 마땅한 저항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란씨앙에게 자오젼후안은 남편으로서 기본 자세와 도리를 방기한 채, 마음속으로 늘 전 부인인 쑨위에를 생각하고 동시에 용서를 구하고 싶어 한다.


이성을 압도한 본능에 의해 란씨앙은 임신이 됐고, 자오젼후안은 이를 ‘실수’이자 ‘천추의 한’으로 여기게 된다. 그가 란씨앙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모습이 ‘정황상’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런 ‘이해’가 그의 가학적인 폭력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부인 란씨앙에게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한 일이 없었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지금까지 나는 당신에게 마음을 바친 일이 없어. 새삼스럽게 당신이 그것을 요구해도 곤란해”라며 냉정한 말을 주저 없이 잇는다.


그의 말을 듣고 불안, 공포, 분노가 서린 란씨앙의 얼굴을 보고는, 자오젼후안은 ‘희미한 쾌감’을 느낀다. 아울러 ‘복수의 기쁨’까지 느끼는 자오젼후안의 가학성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적 배경, 그의 개인적인 가정사 등 어떤 사유를 들이대도 정상참작이 되지 않는 악독한 폭력이다.


자오젼후안이 끝없이 용서를 구하려는 대상인 쑨위에에게는 그가 어떻게 대했었나? 어떤 ‘태도’를 보였기에 ‘용서’까지 구해야 한다는 것일까? 사실 자오젼후안이 휘두르는 수평폭력의 최초 피해자는 현재의 부인인 란씨앙이 아닌 과거의 부인 쑨위에였다.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아”달라며 간절히 호소했던 쑨위에에게 자오젼후안은 ‘얕은 수작’은 그만두라고 했었다. “혹심한 규탄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쑨위에에게 자오젼후안은 뻔뻔스럽다고 몰아붙였다. “당신과 헤어진 다음에 지팡이를 짚고 걸식을 하러 나선다 하더라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아. 더 이상 당신을 만나러 가는 일도 없을 거야”라는 차디찬 이별선고에서도 자오젼후안의 냉혹함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은 언뜻 대중이 혁명의 주체였던 것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는 엄연히 당에 의해 추동되고 정교하게 지휘된 ‘당 지도부 사이의 권력투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들끓는 혁명 에너지를 발산할 공간을 찾던 대중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혹은 만만한 동료 대중들에게 무참한 수평폭력을 행사했다.


아내에게, 전 부인에게 잔혹했던 자오젼후안의 자화상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중국 인민들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사회학자 백승욱 교수는 문화대혁명이 정작 제도적으로 무엇을 남겼는지 불명확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무엇을 남기기 위해, 무엇을 얻어내기 위해 그 많은 사람들이 혁명의 대열에 동참했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어야 했을까? 10년의 광기로 남은 것은 폭력의 상처뿐이었고, 수평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지럽게 뒤섞여 제 나름의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내는 광경을 자오젼후안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남편이 함께 살 수 있도록 전근을 요구해보자고 간청했으나, 쑨위에는 조직의 결정에 따르자는 말만 로봇처럼 되풀이한다. “조직에는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돼요. 나는 당원이니까”라는 그녀의 말은 문화대혁명이 중국대륙을 휩쓸 수 있던 토양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당에 대한 그녀의 성찰 없는 맹종은 흡사 라 보에티가 말한 ’자발적 복종’을 연상시킨다.


라 보에티는 “인민들이 마땅히 느껴야 할 고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실제로 인민들은 폭정을 묵묵히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고 이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언론인 홍세화는 “자발적 복종은 자신이 노예임을 모른 채 편안하게 죽어간다는 의미”라고 말하며, 우리 안에 깊이 안착되어 있는 자발적 복종이 우리 스스로가 노예 상태임을 인식조차 못하도록 조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10년간의 참화 속에서” 혁명의 횃불이 꺼지지 않고 뜨겁게 계속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중국 대중의 자발적 맹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부당한 억압-피억압 구조는 자발적 복종 속에서 은폐되고 윤색됐다. 좌경화된 혁명 열기 속에서 공산당에 철저히 복무했던, 자신들의 존엄과 권리를 스스로 헌납했던 당시 대다수 중국 인민의 얼굴이 쑨위에를 통해 씁쓸히 투영되고 있다.


한 편에서는 수평폭력을, 다른 쪽에서는 자발적 복종을. 이 둘을 섞으면 가학과 피학의 결합, 즉 사도마조히즘이다. 문화대혁명을 전후로 한 중국 사회가 그만큼 병리적이고 모순적이었음을, 가학성과 피학성이 혼화되어 일반 대중들을 끝도 없이 괴롭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휴머니즘이라는 렌즈를 통해 여러 각도로 독해해볼 수도 있고, 가학성과 피학성의 개념으로 문화대혁명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볼 수도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문화대혁명의 폐해를 일일이 열거하는 것보다, 등장인물들이 주고 받는 섬세한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보다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들의 대화에 빠져보기를 권하며 글을 마친다.

* <논객닷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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