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문학 속으로
1955년 2월 8일 김용은 <신만보>에 <서검은구록>을 이듬해 9월 5일까지 연재했다. 그의 첫 번째 무협소설이었다. 친구였던 무협소설가 양우생의 권유로 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김용 독자들에게 <서검은구록>은 양우생의 작품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서검은구록>은 반청복명을 기치로 내건 홍화회와 건륭제, 청에 맞서는 위구르인들의 투쟁을 주된 이야기로 다룬다. 선악이 명확하게 대비되기에 줄거리와 인물도 비교적 단순하다. 덕분에 이해하기는 쉽지만 현대적인 느낌은 좀 떨어진다. 홍화회도 조정에 대항하는 비밀조직인 만큼 첩자나 배신자가 있을 법하지만 그런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악인은 청인이거나 청에 투항한 한인이며 선인은 한인이거나 한인에 협조하는 이들이다. 반청복명의 대의와 홍화회 내부의 의리는 금과옥조처럼 받들어진다. 그렇기에 <서검은구록>은 무협소설의 원류 격인 <수호전水滸傳>과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서검은구록>에는 이후 김용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토대를 엿볼 수 있다. 작품의 전반은 반청복명을 내건 홍화회의 주요 인물들이 납치된 형제를 구해내기 위해 대륙을 종횡무진 하는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과정에서 강호의 도덕과 의리는 물론 홍화회의 무자비할 정도로 강력한 내부 규칙이 그려진다. 강호라는 세계에는 선과 악, 원한과 은혜, 명분과 협의가 법과 질서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조정의 썩은 관리가 간섭할라치면 강호인들은 은원을 제쳐두고 단결하여 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강호의 논리는 국가와 주류 사회의 질서에 대립하는 기층 민중들의 세계를 빗대는 것이기도 하다.
내면에 갈등을 감춘 젊은 남주인공과 활기 넘치고 주도적인 여주인공 등 김용 소설의 전형적인 인물도 등장한다. <서검은구록> 전반의 여주인공은 이원지와 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이들은 사실 활달하다기보다는 제멋대로이고 고집이 세어 사방에 민폐를 끼치는 사고뭉치에 가깝다. 심지어 주기는 사람 죽이기를 서슴지 않아 <수호전>의 살인마 이름을 딴 ‘이규’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호기심에 넘쳐 홍화회에 뛰어든 이원지 때문에 진가락의 애정 관계에 변화가 일기도 한다. 이원지가 남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진가락과 곽청동이 아무 문제없이 맺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용 작품에는 남들과 전혀 상관없을 듯한 개인적인 행동이 예상외로 큰 줄기를 틀어지게 하는 장치들이 제법 등장한다. 대중이 읽는 무협소설 속에서 그런 문제들은 어떻게든 해결되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 일어난다면 한 사람의 일생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서검은구록>에는 역대급으로 꼽힐 만치 참혹한 전쟁 장면도 등장한다. 곽청동은 군대를 지휘하여 위구르인 지역에 침입한 청나라 군을 유인하여 모래 바다에 빠뜨려 죽인다. 서서히 빠져 죽어가는 청나라 군에 대한 묘사는 한족과 이민족의 대립 구도를 떠나 전쟁의 참혹함을 뼛속 깊이 느끼게 한다. 민족이라는 뿌리를 떠날 수는 없지만, 그것을 초월한 보편적인 차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김용은 그 차원을 독자에게 직접 들이대는 대신 젊은 주인공의 내적 고민을 통해 공유하는 편을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