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사모시르 섬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섬나라, 인도네시아.
그중 수마트라(Sumatra) 섬의 북쪽에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 규모의 토바 호수(Lake Toba).
그 전체 면적이 싱가포르보다 크다는 이 호수 안에는 사모시르(Samosir)라는 또 하나의 작은 섬이 있다.
섬 안의 섬이라는 몽환적인 지형과 자연 자체의 날 것으로도 환상적인 풍경은 기본,
인도네시아 안에서도 자바와 전혀 다른 수마트라 고유문화와 풍습을 간직해 또 다른 이국적인 정취를 풍긴다.
거기다 살아있는 자연 유황 온천을 계곡 삼아 몸을 담글 수 있고, 만 원이면 묵을 수 있는 멋들어진 코타지와 오천 원으로 거하게 즐길 수 있는 맛집들까지 가득하다.
그래서 세계일주, 배낭여행자들에게 특히 입소문이 자자한 사모시르 섬.
어떤 포인트에서 뭘 보고 남기기보다 복잡한 것들을 다 비우고 여유를 가득 채울 수 휴양지로 완벽했다.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국가지만 여러 종족이 그들만의 문화와 풍습을 잘 유지하며 어우러 지내는데,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토바 호수는 바탁족의 근원으로 잘 알려져있다.
성격이 호방하고 흥이 많은 민족으로 유명한 바탁족의 조상신이 이 곳 바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런 전설처럼 자연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기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그에 따른 독특한 장례 문화나 제사 풍습도 토바의 신비로운 매력.
위의 사진처럼 집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인형의 집이라고 하기에도 큰 신기한 건축물이 수마트라 전통 양식으로 만든 무덤이다.
바탁 족은 사후 세계와 전생을 굉장히 깊이 있게 생각해서 성대하고 화려한 축제 분위기의 장례를 치르고 그 후의 영혼들이 다른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 곳에 머문다고 여긴다.
그래서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무덤을 짓는데 그 덕분에 이런 종류의 무덤들을 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영혼은 위협적이거나 무서운 것이 아닌 가족이자 수호신의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덤을 지날 때마다 무서운 마음보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잠시 닿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나도 잠시 멈춰서 손을 모았었다.
물이 잠긴 논에 하늘이 비치던 풍경이나 나무에 줄을 엮어 빨래를 널어놓은 모습들.
스쿠터를 타고 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저 사람 사는 모습들이 그렇게 아름답고 벅차게 느껴진다.
넋을 잃고 이 풍경 앞에 있다 보면,
나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지냈었나..,
가까이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쁘다는 핑계로 얼마나 멀리 떨어뜨려 놓았나 하는 반성도, 새로운 다짐도 마음 깊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발 닿는 곳마다 맛집인 이유로 더 천국 같은 토바 호수.
생선요리가 유명한데 특히 호수에서 바로 잡은 Golden Fish(Ikan Emas)라 불리는 생선을 많이 쓴다.
여리하고 통통한 생선살에 착착 감기는 데리야키나 커리같은 아시아 양념들로 민물고기의 잡내를 잡아 음식들이 입맛에 정말 잘 맞았다.
아니 사실, 나는 토바에 머무는 내내 음식들이 입맛에 잘 맞는 정도가 아니라 한 그릇을 설거지 하듯 얼른 비우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레시피를 받아 적고 있었다.
특히 좋았던 건 모든 음식들이 홈메이드라는 점.
거의 모든 식당에서 직접 발효시킨 빵과 요거트를 주문할 수 있고, 커피 재배지로 유명한 수마트라 답게 향이 좋은 커피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덕분에 느긋하게 일어나 먹는 브런치들도 어느 곳 하나 빠질 것 없이 최고.
그렇게 여유로운 낮을 보내고 호수의 고요함이 심심함이 되기 전,
깊은 어둠이 깔린 호수를 곁에 두고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식인 풍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수를 너무 신성하게 여긴 마을 사람들이 이방인을 제물로 호수에 바치고 영혼이 떠나지 못하게 나누어 먹었다는 섬뜩한 이야기.
무서워하길 기대하던 이야기꾼 아저씨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아 그 이야기들이 사실일지 미신 일지는 모르겠지만, 난 먹을 게 별로 없으니 살려주라고 부탁하고는 무서운 안주와 깔깔 거리는 웃음들에 더 빨리 취해 술잔을 얼른얼른 비워냈다.
휴양의 절정 SPA,
토바에는 살아있는 화산에서 흘러나온 유황 온천 계곡이 있다.
툭툭 마을에서 두 시간쯤 스쿠터로 산을 오르면 나오는 이 곳은 자연 그대로의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유황온천 계곡.
시설이 깨끗하지는 않아도 온천물을 받아 놓고 대중목욕탕처럼 만들어 놓은 곳도 있어 미리 갈아입을 옷가지와 씻을 것들을 챙겨갔다.
그간 적도의 태양볕에 고생한 피부를 매끈하고 윤기 나는 꿀광채로 만들었다며 한껏 여리여리해진 기분을 만끽하다 흰 유황석에 제대로 태닝하고 마무리.
사실 피부관리는 뒤로 해도 토바 호수의 비경을 발 밑에 두고 바위에서 솟아 흐르는 뜨거운 계곡물에 몸을 담그면 이제껏 알아 온 산 속의 차가운 계곡물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 금상첨화다.
그리고 온천에서 내려오다 보면 바탁족의 기원에 대해 전시한 박물관이 나온다.
웅장하거나 잘 관리되어 있는 박물관은 아니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잠시 들러 흥미로운 유물들과 바탁족의 달력 등을 볼 수 있다.
책을 잠시 덮고 마주 할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색감으로 새로운 풍경을 보여줬고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내내 10분도 이어 갈 수 없이 브레이크와 셔터를 누르게 한 벅찬 풍경들.
특별하지 않아도 이 잔잔한 호수의 낮을 달리고 밤을 안아 평화로운 마음이 충만했다.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고 다시 시작하기에 완벽했던 곳.
토바는 화려해서 즐길 것이 많은 여행지는 아니지만 그리운 사람들을 헤아리게 하는 수수한 매력이 넘쳤다.
사실 너무 아름다워 외로워지기도 했다.
항상 혼자 하는 여행을 즐긴다 자신했던 나였지만, 이 곳에서 만큼은 외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 혼자만의 기억으로 두기가 너무 아쉬워 다음에 이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 꺼내 볼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으니까.
아직도 내가 기억하는 토바는
감사할 일들이 줄어들고 당연한 일들만 가득할 때, 일상에 지쳐 주변이 회색빛이기만 할 때, 가장 미안한 사람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할 때 다시 와야지 했던 곳.
그보다 솔직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