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읽고 나니까 쓰고 싶어져]

by 영랑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X엄기호

따비

(초판 2020.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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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추천했다. 엄기호라는 작가의 이전 책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최근에 읽었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제목보다는 훨씬 깊은 내용을 담은 책.

생각이 매력적인 두 지식인이 '리터러시'에 관해 나눈 대담을 기록한 책이다.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을 많이도 말해왔다. 그 말은 딱히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상대와 나의 다름을 확인하는 부정적 감탄사 정도였을 것이다. 서로의 경험, 살아온 세상, 만나 온 사람들이 달라서 결국은 같은 '말'에 대해 서로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에, 말이 안 통한다고 푸념하거나 한숨을 쉬거나 대화를 중단해버렸다. 가족들처럼 편하거나, 명백한 비즈니스 관계일 때는 말에 담긴 태도 때문에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때로는 말이 안 통한다 싶다가도 논리적으로 딱 들어맞는 전개를 발견하거나 이해하게 되면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동의의 표현으로서, 내 세계를 넓히는 방법으로써.


그러나 점점 동의할 수 없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비논리로만 논리적일 수 있는 세계를 만나는 일이 잦아진다. 단정적으로 해왔던 말들과 판단과 추측과 분노와 칭찬들을 떠올리며 반성하는 시간들이 많아진다. 굳어진 상상력이 만들어내는 크고 작은 갈등을 목격하는 일들도 점점 빈번하다. 내가 진심으로 소화하지 못한 말들을 하게 될까 봐 대화가 꺼려지기도 한다. 공적인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더욱 두렵다.


세월호 유가족, 미투가 드러낸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 장애인, 퀴어, 4-50대의 '남성' 동료들, 연극인들, 글 쓰는 사람들,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 한국인 남친을 둔 일본인 친구, 교회 다니는 친구, 내 언니 그리고 남편. 나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이들과 안전하게 대화할 수 있을까.


리터러시란,

타인의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윤리적 주체가 되는 역량이자
미래를 대비하여 삶을 위한 능력을 발달시킬 수 있는 의지와 노력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척하면서 다 안다고 생각했던 내 안의 오만도 다시 보았고,

개인이 중요해지는 만큼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고,

내가 나의 세계를 존중하는 만큼 상대와의 연결을 원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리터러시는 나 혼자만이 아닌 타인과의 연결을 위한 역량인 것이다.


두 대담자는 조근조근 논리적이고 섬세하게,

한국 사회가 타인을 이해하는 태도와 시스템과, 특히 읽고 쓰는 교육 환경의 문제를 짚어간다.

물론, 이들 그리고 나와도 태생이 다른 유튜브 세대를 의식하면서.


다 큰 성인이 되었지만 잘 살아가는 게 너무 어렵고, 말이 안 통하는 세상에 좌절한 사람들에게

살아간다는 것의 저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하며 의도치 않은 위로마저 건네는 책이다.



노트한 문장들


p91

개인이 된다는 것에서 고독은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고독해진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로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자기를 대면해야만 내면이 탄생합니다. 내면이 형성되는 계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읽는 행위에서 비롯되죠.


읽기가 어떤 역량을 키워주는가라는 주제와 결합시켜본다면,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와요.


>>> 요즘 나의 읽기가 고독을 견디게 하려면, 읽기를 통해 생각하게 된 것들을 행동으로 드러내고, 반복할 수 있는 만남의 자리가 예정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고독이 공동체 안에 존재할 때 발생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나에게는 사람들과의, 사회와의 관계가 필요하다. 외로움이 아닌 고독이 되려면.


p133-134

리터러시는 단지 개인이 잘 읽고 쓰는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진입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을 사회가 얼마나 잘 닦아놓았느냐의 문제인 거죠.


리터러시의 문제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기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합니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하고 있어요.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는가, 이것이 리터러시의 척도인 겁니다.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 있는 자’에게서 리터러시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죠.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 나아가 이들을 운영할 자본을 가진 이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p159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 우리 사회에는 매개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전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만사 모든 것의 진리와 선악을 판단할 정도의 역량을 스스로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 여러 전문 영역에서 대중이 신뢰할 만한 중간집단, 직능집단의 권위가 회복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신뢰의 조건은 무엇이 될까. 권위를 회복시키는 것은 뭘까. 진정성? 공감? 지성? 서둘러 이해하는 척하며 뭐든 빨리 해결해버리려는 태도나 책임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잔머리는 아닌 것 같다.


p172

미디어 리터러시라고 부르는 ‘보는 것’과 ‘가상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여전히 오고 있는 것, 끊임없이 올 수밖에 없는 것인 ‘말하고 듣는 것’의 리터러시, 즉 말귀를 포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리터러시를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게 되고, 다룸을 통해서 도달하려는 것이 글자나 단어, 개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이해라고 할 수 있게 되겠죠. 그것도 그 타자와 내가 세계를 짓는 역량으로서의 리터러시 말이죠. 내가 쓰는 단어와 저 사람이 쓰는 단어가 똑같은 것이라 해도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 다름은 도대체 어떤 세계에서 만들어진 것인가를 이해하는 역량이에요.


p261

자칫 잘못하면 단어나 문장을 수집해서 쌓아놓고는 나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고 많은 걸 설명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데, 새로운 의미를 산출해내지는 못하는 거죠. 그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을 깊고 두껍게 읽어내지 못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p289

특히 자아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사람들은 자기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남들이 모두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들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도 벌어졌다. 들려야 하는 사람들의 말은 밀려난 채 말이다.

[...]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가 아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빠르게 채워졌다. 이 절대적으로 옳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고 무시했다. 다 알고 있는데 뭘 듣겠는가. 그러다 보니 현장 참여를 해서 말을 들으려 한다면서, 묻기 전에 자기가 다 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배움’이 아니라 ‘동의’였다. 자기에게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이전의 말 걸기와는 달리, 말 걸기의 과정에서 배움의 기쁨을 주고받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자기가 하는 말이 얼마나 대단하고 독특한 것인지 강조하는 말을 들으며 지치는 경우가 많았다.

[...] 말 걸기는 그 이름 그대로 말을 거는 사람을 ‘주체’로, 걸리는 사람을 ‘대상’으로 둔다. 즉, 둘 사이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으며 기록과 해석의 권한을 말을 거는 사람에게 둔다. 완전히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지만, 말 걸기의 문제는 설정 자체가 ‘상호 주관성’을 강조하면서도 궁극적으로는 말 거는 사람을 ‘홀로 주체’로 상정한다는 데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탁월하게 잘하고 있는 분들이 있음에도 현재 유행하고 있는 글쓰기가 문제적이며, 글쓰기의 방법론으로서 구술이나 말 걸기 등등이 또 문제적이 된다. 기록을 한다면서도 말을 걸고 기록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적인 홀로 주체성에서 벗어나기가 좀처럼 어려운 것이다. 또한 말을 거는 이가 “내가 뭘 질문하나요, 단지 기록할 뿐이죠.”라며 자신의 홀로 주체성을 감추어버리는 바람에 인터뷰이 쪽에도 “너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다 기록해야 한다.”는 비대한 자아, 과잉된 홀로 주체성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홀로 주체성에 빠지지 않는 주체성. 자아과잉으로 넘어가지 않는 개성. 타인을 대상으로 만들지 않는 경계를 찾는 것이 정말 어렵다. 우선 듣고, 그다음에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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