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의 퇴사

13일의 금요일, 비를 맞으며 그렇게 퇴사를 했다.

by 전혜윰

Friday the 13th


'13일의 금요일'이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나의 퇴사일이 공교롭게 그날로 확정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외국에서는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날이 13일의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날을 통상 불행한 날이라고 여긴다. 나는 무교인데도 불구하고 막상 퇴사 예정일을 보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날이 나에게는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된 게 조금 웃겼다. 공교롭게 사직서를 내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세차게 비가 내렸다. 문득, '이사하는 날 비가 오면 그렇게 잘 산다는데!'라는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잘되려고 비까지 오는 거야. 좋지 않았던 기분이 고작 쏟아지는 비 때문에 괜스레 좋아졌다.




2년 11개월. 꼬박 3년 가까이 한 회사(이하 M사)에 있었다. 업계에서는 소위 잘 나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내 인생 드디어 피는구나!' 하고 기뻤던 기억이 난다. 아니, 사실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날라갈 것 같던 것 같다. 생생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쩌면 나보다도 나를 더 솔직하게 알고 있는 내 일기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무려 내가 8년 동안 준비했던 꿈 꿔오던 일을 시작하게 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부모님을 따라갔던 여수엑스포에서 나는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라는 게 생겼다. 왜 수능을 봐야 하고 왜 대학을 가야 하는지 몰랐던, 야간자율학습을 밥먹듯이 도망쳤던 그 어린 날의 내가 반짝이는 눈을 가지게 된 순간이었다. 가고 싶은 대학교, 공부하고 싶은 과가 생겼고 꿈에 한 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더 강렬하게 원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에 품은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이 나는지 그 당시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보여줬다. 나는 나의 직업이,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으로 영향을 주고 누군가에겐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아마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찼던 것 같다. 취업 후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는데 가장 열정적이었던 만큼 가장 크게 주저앉았다. 탄탄대로의 출발점이 아니라 불안전하고 장애물이 가득한 비포장 도로였다. 마음속으로 퇴사를 다짐하며 내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에 엄마를 초대했다.


"여수엑스포에서 그렇게 힘든 줄 모르고 관람하더니, 전시 주최자가 되었구나, 멋있다 우리 딸"


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기에 여전히 엄마한테는 퇴사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내가 아플 때마다, 주말에 밤을 새울 때마다, 괴롭힘에 고통받을 때마다 친구처럼 같이 회사 욕해주고 속상해하던 엄마는 아마 나의 퇴사 소식을 들으면 몹시 기뻐해주실 텐데 서른에 변변치 않은 직장 하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직서를 써 내려가며 퇴사 사유에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말을 적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을 때 내가 피해자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주말 출근을 강요하고 부당한 업무를 받았을 때까지는 참을 만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더한 진상도 만나봤는데라는, 일종의 최면이었던 것 같다. 팀회식 자리에서 언어적 폭행과 신체적 폭행을 당하고 나서, 그리고 그걸 묵인하며 성희롱을 장난으로 여기는 대표를 보고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피해자가 나 말고도 여럿 더 있었기에 서로에게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주었다. 발 빠른 이들은 서둘러 이직을 준비했고 결국 가해자들과 나만 남았을 때 더는 견딜 수 없어 노동부에 전화를 했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어렵사리 냈던 용기가 물거품이 되었다.


"모아둔 증거 있으신가요? 증거가 없으면 신고자체가 어려워요"


하루종일 녹음기를 켜두거나 영상 촬영을 하지 않는 이상 그 순간에 증거를 남기기는 쉽지 않다. 더더군다나 막내였던, 그게 직장 내 괴롭힘인지 몰랐던 과거의 나는 그저 이 회사에 내가 몸담고 있는 사실이 좋았기 때문에 미래에 내가 노동부에 전화할 거라곤 예상하지도 못했다. 나의 힘이 생각보다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작다는 걸,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만이 지킬 수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나에게 회사라는 집단은 3가지 가치 중 하나 이상 충족해야 하는 곳이었다.


1. 회사의 비전 자체로 성장가능성이 있는 곳


M사에서는 매년 연말이 되면 사업계획서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그때 각 팀장은 내년도 매출목표를 항상 일정하게 30%씩 높여서 보고 해야 한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매출이 바닥을 쳤을 때 실적압박 스트레스로 눈에 띄게 탈모가 진행된 옆 팀 팀장님의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한 직장 동료와 회사 비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이 회사는 오직 매출상승만이 목표다. 타 회사도 매출로만 평가한다. 그래서 소규모 회사는 무시해 버린다.'라는 말을 듣고 돈이 정말 가장 중요한 가치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돈을 버는 게 회사존재의 이유는 맞지만, 30%라는 막연한 숫자는 사실 와닿지도 않는다. 회사의 비전이라는 건 자고로 직원들에게 동기부여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장률에 따른 연봉인상률, 신규사업 진출을 통한 사업의 확장 혹은 회사복지, 기업문화 등 회사가 발전하는 것에 따라 나도 발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게 중요하다.

내가 가장 불편했던 건 기업문화였다. 한 달에 한 번, 7:50까지 출근해서 경영회의를 가야 했다. 정상출근 시간은 9시. 나는 이 문화에 아무도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또한 '일을 잘한다'는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회사는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았고 주말에 더 많이 출근하는 사람이 승진을 빨리 했다. 18시에 정시퇴근하는 날이 3일 연속이 되면 면담이 잡혔다. 업무시간에 집중해서 업무를 하고 퇴근 후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는 삶을 꿈꾸는 건 질책의 사유가 되었다.

게다가 신규사업을 확장한다고 발표만 하고 제대로 마무리 짓는 사업이 단 한 건도 없었다. 복지는 말할 것도 없다. 연차 쓰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고 휴가를 쓰고 여행 가는 걸 이해하지 못해 맨날 병원에 간다는 거짓말을 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매출을 높이려면 전시 횟수를 늘리면 된다.'라는 단순한 결론으로 인해 전시의 퀄리티는 타인에게 보여주기 창피할 정도로 떨어졌고 나중에는 소위 '5일장 시장통' 같다는 말을 들었다. 비전이 없는 회사는 나 스스로의 의욕을 저하시켰고, 자기 발전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나는 이 회사에 남아있을 이유가 더 이상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 일과 삶 두 가지 측면에서 닮고 싶은 롤모델이 있는 곳


이상하게 그곳에는 기혼 여성의 경력직이 부재했다. 능력도 좋고 일도 사랑했던 옆 팀 동료가 결혼하고 얼마 후 이직으로 인해 퇴사하는 걸 보고 이직을 결심한 계기를 물었다.

"이 회사가 좋은 회사는 아니야. 결혼한 여자가 다니기엔 특히 최악이지. 맨날 밥먹듯이 야근해야 하고 또 일찍 출근해서 임원 눈 안에 들어야 해. 상사는 주말에도 일하기를 원하고 장기 출장도 잦은데 너 같으면 가정을 꾸리고 자녀가 생겨도 이 회사를 다닐 수 있겠니? 게다가 내가 발전할만한 비전도 없어서 이 회사에서 과연 내가 성장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야. 벗어나고 싶었어, 결혼이 아니더라도."

내가 3년 차가 되었을 무렵, 3주 연속 함께 출장을 갔던 동료의 안색이 좋지 않아 걱정을 하니 그 동료가 말했다. "우리 출장 끝나고 집에 갔는데 아들이 나를 못 알아봐. 남편은 나한테 가정을 버리면서까지 일을 해야 되는 거냐고 물어보더라. 나도 이제 이 삶에 지쳐가. 일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한숨을 쉬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하던 그녀는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고 일을 하면서 동시에 엄마로서, 아내로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곳으로 이직하기 위해 퇴사를 결심했다. 그 동료가 사직서를 낸 날, C는 동료의 면전에 대고 '경력단절 아줌마'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나에게 와서 "너는 결혼도 하지 말고 애도 낳지 말아라. 저 꼴 난다. 저게 뭐냐? 한심하게 집에서 애나 볼래?"라고 말했다. 일말의 창피함도 느끼지 못하는 그 사람의 언행에 정이 떨어졌고 나의 동료는 크게 상처를 받았다. 무례한 언행을 듣고 난 후 회사 사람들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3. 동료들과의 시너지로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


회사에서 배우고 발전시킬 수 있는 업무 능력 중 가장 큰 것이 협업, 즉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M사에 입사할 때 협업능력만큼은 꼭 키우고 싶었고 지금은 나의 강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각자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또 잘하는 것을 업무 분담하여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언제나 늘 짜릿하다. 두루두루 잘 지내고 타 팀과 주기적으로 커피타임을 가지는 나는 팀장님의 눈밖에 가장 먼저 났다. 내가 만난 첫 번째 팀장이었던 Y는 강한 탑다운 방식을 선호했고 자신의 팀 외 다른 팀은 경쟁상대로 여겼다. 타 부서와의 미팅자리에서 마치 '갑'처럼 명령어조로 이야기하는 게 늘 불편해서 막내인 나는 눈치보기 바빴다. 그와 함께 하는 미팅은 항상 분위기가 차가웠고 일을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었던 나는 그때 유튜브나 책에서 리더에 관한 영상이나 글을 많이 봤다.

혼자 미팅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연차가 쌓였을 때, 가장 우선순위로 두었던 게 동등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쌍방향 소통이었다. 결국 같은 목표물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야 하는 동료들과 우위를 따지고 쓸데없는 감정소모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다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는 게 나의 목표였고 내가 떠날 때 동료들이 해준 말을 통해 목표달성에 성공했음을 알게 되어 뿌듯했다.

"함께 일할 때 항상 즐거웠어요. 도움 주시고 협조해 주실 때마다 감사했고요. 그리고 늘 따뜻한 말로 편안하게 업무 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더 잘되실 거고 더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길 응원할게요."

나와 일하는 게 즐거웠다는 말만큼 더한 칭찬이 있을까.




퇴사를 하면서 나의 10대부터 20대까지의 서사가 담긴 목표를 결국 이루지는 못했다. 작년에 한 작가님의 북토크에 가서 용기를 쥐어짜서 질문을 하나 한 적이 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걸 빨리 찾았고 실제로 업으로 하고 있습니다. 근데 사람 때문에 그 일이 싫어지려고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 주실 수 있나요?"


그때 그는 내 질문이 끝나자마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명쾌한 답을 주셨다.


"그 사람을 벗어나면 돼요. 퇴사하세요!"


그 말을 듣고도 바로 퇴사하지 못했던 건 나에게 안정감을 주는 컴포트존을 벗어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컴포트존은 소위 말해 단어 그대로 편안한 곳, 안전지대 같은 곳을 말한다. 나에겐 일정하게 들어오는 월급이었다. 카드값, 월세, 결혼자금, 적금 등 나에게 매달 쌓여있는 고정지출은 퇴사를 할 수 없는 아주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점점 안주하다가 이직할 힘도 사라졌을 즈음, '버틴다'는 말이 잘 어울렸던 그 시기에 컴포트존을 벗어나야지만 성장할 수 있다는 글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나 자신을 지켜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결심이 들었던 날, 꽤나 용감하고 당차게 내 미래를 위해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M사에서의 경험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은지, 그리고 미래에 어떤 강점을 지닌 리더가 되고 싶은지 명확하게 목표 설정을 할 수 있었다.


퇴사를 하고 나서 나에게 남은 자산들을 둘러봤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었던 선배들, 멋진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있는 동기들, 나 때문에 버텼다고 말하는 후배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으로 치료했고 지금은 모두 퇴사를 하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 나가고 있는 게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당함에 안주하지 않고, 강압적인 업무방식을 배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의 결단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사실, 나는 3이 들어간 숫자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숫자 13과 애정하는 금요일이 합쳐진 13일의 금요일은 어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일지도 모른다. 그날 세차게 내린 비는 마치 내 상처를 씻겨주는 듯했다. 그렇게 나는 비를 맞으며 꽤나 길게 머물렀던 나의 직장을 떠났다. 문득 악몽을 꾸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관두게 되어 아프기도 하지만 다시 일어날 힘이 점차 생기는 것 같다. 당분간은 마음 회복과 건강에 집중하며 나를 보듬어줘야겠다. 내가 단단해야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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