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한 달
야근과 주말출근이 잦았기 때문에 온전히 쉴 수 있는 주말을 마주하면 쉬는 것마저 사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처리할 업무, 하고 싶은 것을 주말에 몰아서 하니 쉬는 날이 더 바빴고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은 여백 없이 빽빽한 책 한 권 같았다.
숨 쉴 틈, 여백이 필요했다.
혹여 지각이라도 할까 봐 맞춰둔 알람을 모두 끄고 마치 겨울잠에 들어간 곰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어느덧, 퇴사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내 인생 절반 이상을 회사에 투자하던 삶을 청산하면 '진짜 내 인생'이 시작될 줄 알았는데, 일하던 시간을 잠이 채웠고 무력함이 메꿨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박차고 나왔지만 퇴사하는 과정에서 진이 다 빠졌고, 3년여간 고갈된 에너지가 바로 회복될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잠으로 충전되지도 않았다. 여백을 만들고 싶었는데 공백이 되었다. 한 날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는데 처음으로 '공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늘도 백지로 지나갔군.'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번쩍 불이 들어온 아이패드가 보였다.
아이패드를 켜자마자 화면에 '퇴사버킷리스트'가 떴다. 퇴사를 하고 싶을 때마다 적어 내려 간 것인데 제법 많은 30가지가 적혀있었다. 그중 요일로 시작하는 7가지 항목이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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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요일, 오전에 출근 압박 없이 늦잠 자고 오후에 영화 보러 가기
2. 화요일, 전시 오픈런하기
3. 수요일, 낮에 뮤지컬 보기
4. 목요일, 남들 일하는 시간에 여유롭게 카페 가기
5. 금요일, 합정의 핫한 곳 저녁장사 오픈런하기
6. 토요일, 집에서 하루종일 쉬기
7. 일요일, 새벽까지 넷플릭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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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닐 땐 거창하다고 생각한 리스트였는데 막상 퇴사를 하고 다시 보니 피식하고 웃음이 터졌다.
'뭐가 이렇게 소박해.'
무력함이 내 열정의 씨앗마저 말려 죽이려는 찰나에 집 앞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뮤지컬 물랑루즈, 아시아 초연'
오랜만에 결제알림이 울렸다.
공백의 흰 종이 한가운데, 빨간 물감 한 방울이 떨어졌다.
긴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이불 밖으로 나왔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합리화했지만 이불을 벗어나야지만 나아가는 나를 마주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