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은 집이랑 가깝든지 주 양육자 직장이랑 가깝든지, 둘 중 하나가 베스트랬다.
그래서 나의 직장 가까운 곳에 있는 국공립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있다.
내가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일찍 등원시키게 되면 어린이집 버스 1호차가 도착하기 전이라 늘 딸이 제일 먼저 도착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원하는 시간 즈음 출근할 수 있다.
버스 1호차가 도착한 후면 나는 마음이 조금 바빠진다. 출근시간이 다른 직원들 출근하는 보편적인 시간보다 늦어졌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각도 아니건만 나는 등원시키는 워킹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워킹맘 이전처럼 여전히 다른 직원들보다 일찍 도착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아이가 9~10시간 어린이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실이 마음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가 제일 일찍 등원하는 날에는 내 욕심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아려왔다.
아이는 등원준비에 얼마나 협조적인지에 따라 선생님만 계시는 어린이집에 등원하거나 다른 아이들도 도착해 있는 어린이집에 등원하거나 그랬다.
과거엔 퇴근이 좀 빨랐다 싶으면 6시 30분 정도에 했었다. 워킹맘으로 살면서 그 시간 퇴근은 늦은 퇴근시간이 되었다. 6시 10분쯤 어린이집에 도착하면 우리 아이가 혼자 있곤 했다.
국공립이다 보니 '아무래도 맞벌이나 다자녀인 가정이 많겠지.' 생각했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퇴근하고 아이를 벌써 데려갔다고?'
언젠가 남편이 일찍 아이를 하원시킨 어느 날, 평소라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을 시간에 어린이집 불이 꺼져있는 걸 보았다.
'우리 애만 아니면 일찍 문을 닫기도 하나보다.'
회의가 길어지거나 외부교육을 다녀오는 등 6시가 지나게 되면 나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서둘러 키즈노트에 이런 사정으로 평소보다 하원이 늦어질 거라 남겨본다.
그럼 괜찮으니 천천히 오시라는 댓글이 달린다.
하지만 나 때문에 괜히 퇴근이 늦어지는 선생님들께 딸이 행여나 미움을 살까 걱정이 되었다.
아이 병원을 데려가려고 조퇴를 하고 평소보다 이르게 하원을 시킨 어느 날에는 선생님이 어느 엄마에게 오늘 하루 어땠는지 이야기하고 엄마도 궁금한 것을 묻기도 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로도 가끔 이른 하원을 하게 될 때 그런 다른 엄마들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제일 늦게 하원시키는 마당에 그런 여유를 부리기가 선생님들께 미안해서 서둘러 아이를 챙겨 나오기 급급했다.
시간 외 근무를 하는 날, 회식이 있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몸이 아프신 친정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당신 몸도 힘들면서 딸의 도움요청을 마다하지 못하셨다.
언젠가부터 하원 버스 운행시간쯤 하원하러 오시게 되었는데 이유를 물으니 딸이 일찍 오면 좋겠다고 했다고 한다.
딸은 종종 그러한 이유로 나보다 할머니가 하원시키는 날을 좋아하곤 했다.
그리고 일찍 하원시킬 수 없는 내 마음은 미어졌다
'뭐 어때, 잘하고 있구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마음이 불편하면 일을 그만둬야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등하원도우미를 활용하면 될 텐데.'라고 조언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손에 모든 걸 꽉 쥐고 어느 것 하나 내려놓지를 못하니 무거운 마음을 이렇게 이고 지고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제일 먼저 등원하고 제일 늦게 하원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나는 자주 마음이 복잡해진다.
일을 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늘 선택의 무게를 안고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무게를 조금 덜어내기 위해,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지려 한다.
첫째, ‘미안함’보다는 ‘신뢰’를 품자.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는 대신, 아이는 나와 함께 이 시간을 잘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품자.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결핍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상을 살아가는 소중한 경험이 되도록 아이를 신뢰하자.
둘째, ‘완벽’보다는 ‘진심’을 선택하자.
등하원을 완벽히 챙기지 못해도, 매번 웃으며 안아주고, 눈을 맞추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그 순간들이 아이에겐 더 깊이 남는다고 믿자.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은, 가장 완벽한 시간보다도 따뜻한 진심에 담겨 있으니까.
셋째, ‘죄책감’보다는 ‘자기 존중’을 기억하자.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나 자신도 돌봐야 아이에게 더 건강한 사랑을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나의 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이에게도 ‘자기를 존중하는 삶’을 가르치는 길일 수 있다.
지금 나는, 아이와 나의 하루를 그렇게 지키는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조금은 외로운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그 속에서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아이는 내가 주는 사랑을 품고 자라고, 나는 아이 덕분에 나 자신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도 서로를 키우며 하루를 건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