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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휘케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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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Dec 19. 2021

[휘케치북] 21.12.19

추천곡과 더불어 소소한 일상과 생각을 담았습니다

‘와락 - 임소정’

‘테두리 - 백야’


돌이켜보면 늘 인생이 풍요롭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재물의 정도와 둘러싼 세상의 파고와도 무관하게 지난 삶이 그러했습니다.

내 마음에 심어진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느끼기에 삶이 풍요롭다는 것은 축복할 일임은 분명하고

이런 풍요의 기반 중 하나는 매번 좋은 인연들을 만난 것입니다.

인연,

돌고 돌아 다시 사람, 늘 사람입니다.

스스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마음에 굵고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다 여겨도

타인과 부대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 타인의 영향이란 지대합니다.


어제는 동화처럼 눈이 내렸고 금세 쌓인 눈에 망원동이 새하얗게 뒤덮여 동화 속 마을이 됐습니다.

동화 같은 망원동 마을에 어둠이 내려

휘겔리 가족들과 여섯 시부터 시작한 식사 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습니다.

그간 근황과 생각, 각자 이미지 등 다양한 이야기를 했고

롤링페이퍼를 쓰기도 했고

한 달 반 전에 정한 마니또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와 음료로 배가 불러 느슨해진 새벽엔 한강으로 나가

눈을 만지고 던지고 사진을 찍었는데

새벽 두 시, 한강엔 아무도 없었고 세상은 희었으며 마음도 왠지 티 없이 맑았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워야 할 밤하늘엔 둥그런 보름달이 떠서 환히 비추고 있었고

눈이 쌓이고 조명이 켜져 흰 농구코트에 저마다 선 가족들이 청춘 다큐 속 인물들 같아 보기 좋았습니다.

동화 같은 하루를 보내라고 하늘에서 내려보낸 눈이었나 봅니다.


진짜 마지막의 순간들을 보내고 있구나 자각했었는지

멀리 한강을 빙 돌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아쉬움과 아련함 비스무리한 감정이 들었고,

그 늦은 새벽녘,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추위에 떨고 움직인 몸의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라면을 끓였습니다.

많이 먹어서 소화가 잘 안된다며 움직인 발걸음이었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모든 뒷정리를 하는 동안 꽤 늦은 시간이 됐고

마치 시험기간에 밤을 새우는 것처럼 몽롱한 느낌으로 개개인의 짐을 또 정리했습니다.

집 안에 불이 밝고 각자 짐 정리로 소란한 가운데 잠시 눈을 감았는데 그대로 잠들었다가

수백 번쯤 제 몸을 흔들었을 듯한 핸드폰 진동을 부여잡고 간신히 일어나니 아침이 됐습니다.


두시, 이제 모두 대문을 나섰습니다.

집에는 오전 내 틀어둔 캐럴이 크게 울렸지만 왠지 음악 소리가 없었으면 하여 정지 버튼을 누르고서

떨어진 쓰레기를 줍고 이층의 이불을 걷어 세탁실로 옮겼습니다.

어수선한 뭔가를 조금 정리하고서 옷을 갈아입고 앉으니 글쎄 마음이 묘했습니다.

탈력감 그런 비슷한 무언가였을까.


휘겔리의 스케치북이라 부르는 휘케치북 글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휘겔리가 무엇인지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함께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지인들 중에도 그렇습니다.

휘겔리 이야기는 세계여행에 대한 이야기와 연속선 상에 서있기에 ‘세계여행을 떠나는 이유’ 시리즈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시작되고

그 글이 끝나야 휘겔리에 대한 것도 마무리될 것입니다.

늘 그랬습니다.

어떤 마지막 순간이 있더라도 내 마음에 진정한 마지막은 그것으로부터 한참 시간이 흘러

감정과 기억을 갈무리 한 어느 날 비로소 끝이 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지내던 휘겔리의 이야기는 잠시 여기서 시간이 멈췄다가

언젠가 불현듯 글로써 시작하여 다시 꽃 피우고 그 글이 끝나는 날 하나의 점 정도의 마침표를 찍을 것입니다.


이동의 잔재로 조금은 너저분한 듯한 거실에 앉아 글을 쓰며 둘러보는 풍경은 어제 오후와 크게 다를  없습니다.

눈은 아직도 녹지 않아 쌓여있고 휘겔리 마당의 대문 위에도 소복합니다.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은 아주 다른 날입니다.


손 틈새로 빠져나가버리는 모래알처럼

붙잡고 싶었던 많은 것들이 글을 쓰고 눈과 마음에 담고 사진으로 담겨 애를 써도

시간의 작은 흐름에도 지나가고 사라져 무엇하나 손에 쥔 것 없어 아쉽고 공허하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당신들 그 하나만은 남았다.

그리 여기는 나이니 살다가 언젠가든 찾아다오.

나의 모든 인연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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