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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두꺼운 껍질은 두드려서 깨야한다

모든 변화의 시작점

 필리핀은 일 년 내내 더운 나라지만 기후는 여름날 한국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여름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일이지만 요즘 우리나라 여름이 더 매섭다.

 더운 날이 지속되기 때문인지 동네의 개들이 저마다 기운 없이 늘어져있다. 

 여행객들도 저마다 바삐 움직이지 않으면 늘어지기 십상인데 대체로 낮에 실내에서 휴식을 취하고 해가 지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어느 곳에서나 바다가 가깝고, 수많은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을 밤에만 즐기기엔 역부족이다.


 일본인 셋, 한국인 넷이 세부 남쪽으로 가기 위해 모였다.

 나는 마음이 가난하고 이십 대 초반의 아이들은 금전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가난한 마음들을 모았다.

 저마다 취향은 다르겠지만 해외에 나온 사람 마음은 같은지 여행 중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것을 찾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과 관점으로 우리보다 앞서 필리핀에 머물며 여행 다녀온 사람들의 말을 참고해서 계획을 세웠다.

 벤을 빌려 남쪽으로 떠나는 길에 앤드류에게 음악을 부탁했고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팝송이 흘러나왔다.

 유명한 것 중에서도 보편적인 노래를 틀고 가장 쉬운 부분만을 따라 하면서도 그 재미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았다. 

 Justin Bieber와 Charlie Puth의 노래가 이에 속했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는 팝이 유일했으나 트와이스 노래는 국적과 무관하게 함께 즐겼다. 

 이때가 가장 신났다. 

 역시 노래는 떼창이 제맛이다.

 해외에 있는 동안 팝을 듣는 것이 자연스럽다. 

 음악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습관이 있는 나로서는 이번 기회에 보다 많은 팝을 들으면서 노래에 세계여행을 묶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행복하다!"

 모알보알에 도착해서 해수욕을 즐기며 물에 동동 뜬 내가 허공에 행복을 뱉었다.

 행복하고 싶다는 내 바람과 이 특별한 시간을 모두 행복하게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이런 나를 보고 있던 히로는 내게 왜 이렇게 에너지가 많냐고 물었다.

 필리핀을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된 술자리가 남은 사람들의 즐거움으로 전환됐던 지난밤에 이어 오늘도 펄펄 날고 있는 내가 신기한 눈치였다.

 나는 기이하게도 함께하는 활동에서 에너지가 떨어지질 않는다.

 아무리 늦게까지 놀더라도 내가 먼저 그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은 체력이라고 해야 할지 열정이라고 해야 할지 고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고 더 즐겁고 싶으니까, 함께 있는 그 순간의 즐거움이 금세 날아가버릴까 아쉬우니까 그렇다.

 나는 딱히 재밌는 사람은 아니지만 함께 하는 시간의 힘을 알고 있다.

 어떤 것이든 그 경험에 온전히 몰입한 사람이 늘 승자라는 것도 알고 있다.


 구명조끼와 헬멧을 착용하고 가이드와 함께 계곡 상류로 이동했다. 

 세부 남부 여행에서 즐길 수 있는 캐니어닝을 하기 위함이다.

 캐니어닝(Canyoning)은 계곡을 타고 내려가는 스포츠다. 걷고, 수영으로 물을 통과하고, 때로는 다이빙으로 이동한다. 

 상류에서부터 하류까지 몸으로만 내려와야 하니 인간 래프팅이라고 할 수 있다.

 등산은 계곡 옆에 등산로를 따라 걷기 마련인데 캐니어닝은 계곡을 따라가기 때문에 생소하고 신비한 모험을 하는 기분이다. 

 옷이 물에 젖어 찝찝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산 중에 물에 마음껏 빠지면서 계곡을 가로질러야 한다. 

 그래서 물을 헤엄치며 앞으로 가야 할 때는 왠지 모를 통쾌함과 즐거움이 있다. 

 롯데월드 신밧드나 에버랜드 아마존을 몸으로 체험하는 기분이어서 산 전체가 하나의 놀이공원이다.


 그리고 각 구간에서 다이빙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캐니어닝에 열광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여기가 다이빙 장소인가.

 뛰어내리라고 하는데 심장이 두근거리고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끝내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세부 남쪽 카와산에서 하는 캐니어닝은 열 번 정도의 높고 낮은 다이빙 구간을 지나가야 한다.

 처음 몇 개 구간은 모두가 즐길 수 있는 높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놀랄 만큼 높은 장소가 등장한다. 

 여기부터는 용기와 선택의 문제다.

 가장 높은 곳의 높이에 대해서는 사람들 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10-14m라고 한다.

 포기해도 된다는 가이드의 말이 그동안 지레 포기했던 수많은 기회들을 떠올리게 해서 악착같이 모든 구간을 뛰었다. 

 살면서 사람들은 늘 다음이 있다는 말을 건넷지만 늘 그때의 경험은 그때만 이었다. 

 나는 경험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느낌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스쿠버 다이빙을 도전할 때 이야기 나눴다.

 디딘 발을 앞으로 던져 버렸을 때 몸은 순식간에 그 높이만큼 밑으로 떨어진다.

 내가 더 이상 지지할 곳이 없어 밑으로 추락할 때, 그 찰나의 허공. 이 허공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뛰어내린다.

 물 위로 떨어진 몸이 머리끝까지 잠겼다가 다시 몸으로 솟구칠 때 그때까지 쉬지 못한 호흡을 내몰아 쉬며 생명의 기운을 다시 채운다.

 산소보다 빠르게 성취감과 쾌감이 몸에 가득하다.

 그 상태로 몸을 물 위에 뉘어 내가 떨어진 곳을 다시 바라보면 내가 저만큼 뛰어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이빙 높이는 더 높아져간다.

 앞서 여러 번 해봤다고 해서 무서움이 줄어들지 않지만 이전에 뛴 높이만큼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사실 중 하나다. 그보다 조금 더 높아졌을 뿐이다. 


 가장 높은 곳까지 모든 다이빙 구간을 뛰어내린 뒤 물에 가만히 떠있었다. 

 해보지 않았으면 짐작만 했을 것들, 해보지 않았으면 짐작도 못했을 것들이다.

 내가 뛸 수 있는 높이, 내가 뛴 높이가 생겼다.

 시도해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경험을 통해 시도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내 생각 속의 한계가 하나 무너졌다.


 세계여행 중 가능하다면 많은 것을 도전하고 경험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이만큼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주고 싶다.

 그러다 보면 다들 그렇게 산다던 내 머릿속 세상도 무너지려나.


 사람들이 왜 필리핀으로 가는지 물었다.

 나 자신에게도 물었던 질문이다. 

 왜 세계여행의 시작이 필리핀인지에 대해.

 선택은 옳았고, 세계여행을 마치고 나서도 내 시작은 필리핀이어야만 했다고 생각한다.

 금요일에 회사를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이틀 뒤 비행기에 올라탄 세계여행이다.

 필리핀에서 여행에 필요한 것을 배웠고 여행에 필요한 준비를 했다.


 영채, 민수와 온 동네를 누비며 삼총사 역할을 하던 내 코 흘리게 시절에, 할아버지가 호두를 손안에 넣고 굴리던 것을 본터라 처음엔 그것이 먹는 것인 줄 몰랐다.

 엄마랑 할머니가 호두를 깨서 그 안에 있는 알맹이를 꺼내는 것을 보고서야 호두를 깨야 하는 걸 알았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용을 써도 호두는 입을 벌리지 않았다. 

 마당에 던지고 돌로 내리쳐서 박살난 호두 껍질은 굉장히 두껍고 딱딱했다.

 알맹이마저 박살 난 호두를 보면서 이렇게 힘들게 먹을 수 있는 건 안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호두를 까기 위해 망치로 두드리고 있었다.

 두꺼운 껍질은 두드려서 깨야 한다. 

 나는 여전히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도 그렇다. 

 내가 가진 기존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두드려야 한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많은 것을 비우고 좋은 것들로 다시 채워 넣고 싶었다. 

 이게 첫 단계라고 생각했다. 

 다양한 상황 속에 나를 데려다 놓고 각양각색의 경험 속에서 내가 깨지길 바랬다. 

 그러기 위해 기존에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이다. 

 기존에 하던 것을 안 하는 것이다. 

 기존과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망설이던 것을 용기 내서 해버리는 것이다. 

 많은 것은 용기와 선택의 문제였다.

 세계여행을 하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출발한 순간이 이 여행 전체만큼 중요하다. 

 그 용기와 선택으로 내 인생의 틀에 균열이 생겼고 나는 나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여행 하나가 뭐 그렇게 무거운 의미를 갖나 싶은 이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환경은 그렇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균열이 일어났지만 나라는 사람의 껍질은 여전히 단단하다. 

 그러니까 나를 호두껍질 까듯 깨뜨리고 싶어서 여행의 시작으로 필리핀을 택한 것이다.

 필리핀은 안전한 환경에서 자란 이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나라다. 

 뉴스에서는 가까운 곳에 테러범들에 대한 진압 작전이 속보로 나오고 총기를 소지한 사람이 여기저기에 있다. 

 필리핀 친구들이 길을 갈 때는 가방이나 지갑, 핸드폰을 꼭 조심하라고 말할 정도로 소매치기도 많다. 

 비쩍 마른 개들이 여기저기 어슬렁 거리고 물에는 석회가 포함되어있어서 꼭 생수를 마셔야 한다. 

 석회가 샤워기 구멍을 막으니 뚫린 구멍의 수압이 세져서 내가 필리핀에 도착한 날 새벽에 샤워하는 동안 온몸이 따가웠던 것이다. 

 안전에 대한 규제가 느슨하니까 액티비티 활동에서 이런 높이의 절벽 앞에 설 수 있는 거다. 

 우리나라였다면 난간마다 말뚝과 밧줄로 위험을 표시했을 테다.

 여전히 수영을 못하는 내가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고 고소공포증이 있는대도 높은 곳에 섰다. 

 글을 쓰면서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에 땀이 나지만 결국 나는 그 높이에서 뛰어내렸고 그 높이는 앞으로도 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도망가지 않고 뛰는 것을 선택했다. 

 이때 다이빙을 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연결되어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는 도전이 아니라 즐기면서 뛸 수 있었다. 

 수영을 못하는 내가 물을 즐거워하게 되고 혼자 섬에서 낭만을 즐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필리핀은 이 모든 변화의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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