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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예기치 못한 일

이야기가 하나 더 쌓인다

 김영하 작가의 책 ‘여행의 이유’는 방금 도착한 중국 푸둥공항에서 추방당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작가는 의외로 최악의 기분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매우 진귀한 경험이고, 언젠가 쓰게 될 하나의 이야기라고 예감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다.

 그래서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는 순간들을 최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괴롭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나의 이야기가 하나 더 쌓일 것이라고 믿는다.


 필리핀에는 천혜의 자연이 보존된 섬이 있다. 

 다이버뿐만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물과 같은 장소로 여겨지는 곳. 팔라완이다.

 여행자들은 코론, 엘니도, 푸에르토 프린세사를 주로 가는데 특히 코론과 엘니도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코론 여행을 마무리하는 날, 탈은 그날 새벽에 일어났다.

 괴이한 상태의 배를 부여잡고 침대를 뒹굴고 열두어 번쯤 화장실에 다녀올 무렵에는 벽에 기대어 기도했다. 

 새벽 4시부터 시작된 아픔은 동이 틀 때까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마셨던 물을 다 토하고 변기를 부여잡고 있다가 다시 쓴 물이라도 토해내면 그때 잠시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7시쯤 1층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려오자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옆의 약국이 열면 가보라고 했지만 약국으로 안 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새벽 동안 온몸으로 느껴왔다.

 불현듯 지난밤 징이 소개해준 다이버 샵이 떠올랐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기다시피 하며 힘을 다해 그곳으로 가보니 문은 닫혀있었고 연락처가 붙어있었다.

 간절한 심경으로 건 전화에서 들려온 한국말이 너무도 반갑다. 

 이른 아침 전화에 대한 사과와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니 사장님께서 내게 무조건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병원이 지금 열어있고 트라이시클을 타고 병원이라고만 해도 안다고 했다. 

 예약 다이빙 때문에 이곳에 없어 미안하다는 마지막 그 말이 약손처럼 따뜻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길가에 주저앉아 트라이시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병원에 들어서면서 내 상태를 전하자 그들은 알았다는 듯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병원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태연한 그들의 표정과 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됐다.

 타는 듯한 갈증에 물을 청하자 물은 안되고 게토레이를 사서 음용하라고 했다.

 힘이 없어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병원 건너편 약국에 다녀왔다.

 배에 음료가 들어가자마자 속이 요동치며 화장실을 찾아야 했는데 화장지가 없어서 간호사를 불러야 했고 힘없는 손이 물이든 바가지를 들지 못해서 뒤처리를 하지 못했다.

 창피함도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내게 절대적 안정이 필요하고 오늘 어떤 활동을 하는 것이 무리라고 말했다.

 나는 몇 시간 뒤 엘니도로 가는 배를 반드시 타야 한다고 했다. 

 고개를 내젓던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링거와 약 처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주저 없이 링거를 택하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종이에 수많은 약들을 써주면서 약국에서 사 오라고 했다.

 그제야 이곳의 시스템을 알 수 있었지만 약국까지 갈 힘이 없어서 그저 슬픈 눈으로 의사와 간호사를 바라봤다.


 간호사가 약을 사 오기까지 나는 그들이 지시한 이동식 침대에 누워있었다.

 카운터 겸 진료석 바로 맞은편에 펼쳐진 간이침대다.

 잠시 후 의사는 준비한 모든 약을 믿을 수 없이 거대한 팩에 넣고 섞은 후 공중에 매달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거대한 링거를 올려다봤다.

 탈수 탓인지 온몸에 느껴지는 추위에 나는 담요를 청했고 링거가 주사를 통해 몸으로 들어올 무렵부터 걷잡을 수 없는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동안 알레르기 반응 테스트, 약 첨가 등의 처치를 받았지만 어렴풋하여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링거를 맞은 지 2시간이 넘어갈 무렵 눈을 뜬 나는 상태가 호전됐음을 알 수 있었다.

 안도와 감사의 기분으로 가만히 누워서 이제는 링거가 다 투여되기만을 기다렸다.


 한참을 누워있다가 의사에게 조심스레 손을 들고 링거를 가리켰다.

 배를 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 투여되는 속도를 빠르게 조절해 줬다.

 마침내 모든 수액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한번 의사와 면담을 하면서 나는 내 상황이 호전됐음을 알렸고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주의사항들을 전했다.

 초주검 상태로 왔던 나의 세 시간 전을 떠올렸기 때문일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신 “크레이지”라고 했다.

 병원 앞 약국에서 처방전의 약과 게토레이를 사서 기어이 배에 탑승했다.

 표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 자리는 no seat 배 밖이다. 

 그래 내가 미쳤지. 

 기어이 배를 타러 가겠다는 내게 미쳤다고 말하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김영하 작가와 같이 이런 상황도 지나갈 것이고 이야기로 남을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 순간들을 그렇게 보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픈 와중에도 정신 못 차리고 사진을 찍고 다음 일정을 챙겼다.

 실은 이런 예기치 못한 순간이 여행 동안 물밀듯이 닥쳐올 줄 알았다. 

 크고 작은 사고로 얼룩져 에피소드들이 탄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특별한 순간은 그런 사고 같은 순간이 없어도 마음에 닥쳐온다는 것을 잘 모르던 여행의 초입이었다.

 멀리 보이는 엘니도는 큰 바위 산이 둘러싸고 있었다.

 엘니도 역시 아름다웠지만 개인적으로는 코론이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코론을 떠올리면 아이유의 <팔레트>가 생각난다.

 스물다섯의 아이유가 보라색이 좋다 하고 서른 살의 권지용이 그 눈부신 나이를 응원하는 노래가 귓가에 들린다. 

 전후 관계가 바뀌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매우 진한 기억이어서 지금도 아이유의 <팔레트>를 들으면 이동하던 봉고차 안, 여행지의 사람들, 탑야스에서 보던 석양 등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유독 아름다웠던 장소들이 아니라 이동하는 봉고차 안이 가장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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