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라는 것은 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땐 햇살이 커튼 사이를 지나 침대 머리맡을 비추고 있었다.
이 햇살이 눈가에 찰랑여서 잠에서 깼나 보다.
방 안이 건조해서 목안이 깔끄러웠다.
라디에이터가 있는 곳에서는 이 건조함이 유일한 단점이다.
생수병에 물을 다 마시고 수돗물을 다시 채웠다.
핀란드에서부터 수돗물을 병에 담아서 마시고 있다.
동남아에서는 석회가 섞여 있어서 생수만을 마셔야 했고, 서울 아리수도 끓이거나 정수해야 하는데 이곳의 수돗물은 그대로 음용 가능하다.
물이 들어가자 몸 안의 장기도 이제야 깨어나 배고프다고 아우성치는 기색이다.
2층 식당에서 크루아상과 커피, 요플레를 챙겨 먹고, 나올 때 청사과 하나를 베어 물었다.
조식이 제공되는 북유럽 숙소에서는 꼭 빠지지 않고 요플레와 과일이 있어서 좋다.
베르겐으로 간다.
베르겐은 오슬로 이전 수도였고,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도시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트레킹을 연속하면서 자연의 매력에 푹 빠져있기 때문에 지나칠까도 생각했지만 다음날 페리를 통한 이동과 아름다운 드라이빙 경로를 여유롭게 즐기기 위해서는 베르겐에서 하루 머무는 것이 현명했다.
피오르드에 위치한 이 도시에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했던 오슬로와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정도의 기대감은 있었다.
노르웨이의 도시를 거점으로 여행을 진행하고 싶다면 베르겐은 탁월한 위치다.
피오르드를 따라 명소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지도상에서 좌측부를 주로 여행하게 되는데 베르겐이 그 좌측부에서 위아래로 적당한 위치에 있다.
항구를 끼고 마을의 목조 건물들이 독특한 모양으로 위치하고 있어서 바이킹이 사는 곳에 온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목조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겨울왕국의 모티브가 된 도시기 때문에 그 작품을 좋아한다면 도시 전경이 반가울 것 같다.
노르웨이 도시를 떠올리면 기대하던 풍경이 이와 같았다.
그래 오슬로는 왠지 내겐 너무 세련되고 삭막한 북유럽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YMCA 호스텔에 짐을 풀고 밥부터 챙겼다.
재스민 쌀을 넉넉한 물로 끓이면서 전날 어머님께서 주신 김과 스팸을 꺼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한입한입 꼭꼭 씹으며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다른 여행자들도 각자 준비한 식재료로 요리를 하고 있었다.
파스타를 시도하는 사람이 가장 많았는데 올리브 오일과 양송이버섯까지 준비한 이들의 솜씨가 대단해 보였다.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적은 수의 편 마늘이 올라갔지만.
밥을 먹고 멀뚱히 앉아있다가 산책을 할 생각으로 라운지를 나서려는데 일본인 친구 두 명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의아한 눈으로 상대를 보다가 그동안 배운 몇 가지 일본어로 응대하니 꺄르르 웃는다.
일본 친구인 줄 알았다며 처음에 인사를 받아줄 때도 너무 능숙하게 일본어를 해서 깜빡 속았다고 했다.
이래 봬도 필리핀에서 일본 친구들과 함께 지낸 나다.
산책을 나가려 하는데 갈만한 곳이 있을지 물으니 뒷동산에 올라가면 베르겐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 근사하다는 말에 길을 나섰다.
지나는 길의 풍경은 몹시 정겹고 활기찼다.
너무도 광활한 노르웨이를 가로지르는 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모두 이 도시에 모여있는 느낌이었다.
걸어 올라가기에는 상당한 거리여서 산책의 개념을 벗어날 듯했는데 정상으로 가는 열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장소와 상관없이 높은 곳에서 어떤 전경을 내려다본다는 것은 묘한 감동이 있다.
대단한 풍경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형태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한눈에 담아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르겐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발길이 닿는 대로 숙소 근처에 있는 작은 상점에 들어가서 아기자기한 소품을 구경했다.
주로 캠핑과 관련된 용품이 많았는데 머그컵과 장갑, 텀블러, 냄비 등 갖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코펠 세트와 침낭, 버너 정도만 있으면 첫날처럼 산에서 고립될 위기를 만나도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듯했다.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데도 침낭이나 텐트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에 여행 중 비상시 침낭이나 텐트가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노르웨이에서 그런 장비들이 만약을 대비한 것이 아니라 더 풍부한 경험을 위한 용도라는 것을 깨달았다.
경험과 생각이 한정된 탓에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캠핑카나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이들을 볼 때면 부러웠다.
특히 트레킹 장소마다 말도 안 되는 산기슭에 야영을 준비하고 누워서 하늘을 보는 이들에게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나도 충분히 자유롭지만 숙박까지도 벗어난 이들의 여행에는 비교할 수 없다.
숙소 앞 부두는 베르겐의 중심가이기도 하다.
부두를 따라서 어시장과 수상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어서 모습 자체가 낭만이었다.
먹거리를 판매하는 붉은 천막들이 늘어서 있는 틈으로 들어가서 맥주 한잔 할 생각으로 앉았는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큰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숙소와 베르겐 산책 중에 일본인을 많이 본터라 이 청년 또한 일본인인가 싶어서 조심스럽게 "한국인이세요?"라고 물었다.
"네! 어시장에 들어올 때부터 한눈에 알았어요" 라며 또 웃는다.
이곳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이 모두 일본인이어서 자신도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오랜만에 한국 사람을 만나서 반갑다고 했다.
교환학생으로 와서 방학기간에 아르바이트 중이라고 했다.
즉석에서 해산물을 잡아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식욕이 돌아서 맥주와 함께 피시 앤 칩스를 시켰다.
상큼한 IPA맥주는 그 자체로 맛있었지만 튀겨진 대구살을 타르타르소스에 찍어 먹고 나서 마시면 더 좋았다.
감자튀김과 오징어링까지 전혀 모자람 없는 구성이었다.
베르겐 밤바다에 왁자지껄함과 해산물을 조리하면서 풍기는 냄새, 맛있는 음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향긋한 맥주를 마저 비우고 나가면서 인사를 건네는데 청년이 다가와서 일 끝나고 맥주라도 한잔 어떠냐고 물었다.
숙소 YMCA가 바로 앞이기 때문에 일이 끝나고 다시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막차 시간이 될 때까지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스키를 배우기 위해 노르웨이로 왔다.
반년 동안 그가 느낀 노르웨이는 놀라웠고 일부는 내가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과 같았다.
학생으로서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노르웨이 문화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서 의외의 말을 했다.
"절대"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나라와 이곳의 차이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이 나라에는 "절대"라는 것이 없구나.
세계여행을 하는 사람 치고는 멀끔하다는 말을 또 들었다. 두 번째다.
굳이 꼬질꼬질할 필요는 없지만 나도 세계여행을 시작하면서 상상한 내 모습과 다르게 멀끔하다는 생각을 몇 번 했던 터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고, 옷은 틈날 때마다 손빨래하고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지저분할 요소는 없다.
콧수염은 원체 잘 안 나서 3일에 한번 정도 면도를 해야 할 정도지만 그마저도 굳이 3일 동안 안 할 이유가 없어서 말끔히 하고 있다.
나는 늘 멀끔한 것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고 대학교 때도 잠깐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있어도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기 일수였다.
고등학교 사물함에는 클렌징과 샴푸, 수건이 있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당시에 학교에서 씻는 학생은 반에 한두 명이 있을까 했다.
늘 멀끔하게 씻고 가지런히 머리를 넘긴 후 좋은 스킨 냄새를 풍기며 정장을 입고 출근하던 아버지를 보고 자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좋은 냄새와 깔끔한 인상은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아버지는 4-5년을 중국에서 지내다 온 이후로 자연인이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째서 그렇게 햇볕에 탄 거야?"
"이 주일 정도 줄곧 걸어서 여행을 했거든. 여기저기. 배낭과 침낭을 짊어지고 말이야. 그래서 그을린 거야."
"어떤 곳?"
"가나자와에서 노트 반도를 한 바퀴 빙 돌았어. 나가타까지 갔었지."
"혼자서?"
"그래." 하고 나는 말했다. "여기저기서 어쩌다가 동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로맨스는 없었어? 여행길에서 어쩌다가 여자와 알게 됐다든지."
"로맨스?" 하고 나는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이봐, 역시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침낭을 짊어지고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걸어 다니는 사람에게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로맨스가 생겨날 수 있단 말이야?"
"언제나 그렇게 혼자서 여행을 하는 거야?"
"그래"
"고독을 좋아해?" 하고 그녀는 턱을 괴고 말했다. "혼자서 여행하고,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 떨어져 앉아 강의를 듣는 게 좋아?"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을 뿐이지. 그런 짓을 해봐야 실망할 뿐이거든."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맞다. 고독을 좋아하는 인간이란 없다.
베르겐(Bergen)에서 눈을 뜬 아침에, 전날 있었던 모든 일이 아름다웠다는 생각을 하며 괜히 먼 곳까지 산책을 다녀왔다.
나는 늘 좋은 순간에 대한 갈무리가 필요하다.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들을 마음에 새기는 거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마법 같은 오후였다.
목조 건물을 비추던 포근한 가로등 불빛과 부두에 늘어선 천막들, 배를 이용한 수상 레스토랑 이 모든 것이 자고 일어나니 온데간데없다. 베르겐이었다.
절경이라는 피오르를 보기 위해 베르겐에서 구드방엔(Gudvangen)으로 이동했다.
2시간가량 페리를 타고 플롬(Flåm)으로 향하는 길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지정된 피오르를 볼 수 있다.
피오르드는 아름다웠으나, 개인적으로는 깎아져 내리는 듯한 절벽이 그대로 솟아 오른 듯한 Lysefjord의 협곡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완만한 경사의 산이 만든 골짜기를 지나는 느낌이어서 친숙하고 관광을 하기엔 왠지 아쉽다.
헬기나 드론처럼 높은 고도에서 전체를 눈에 담을 수 있다면 더 나은 경치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여행자들이 빼곡히 자리한 갑판 위에서 보는 시야는 너무 가깝고 좁기 때문인지 보트 체험 같았다.
허기질 때 페리 지하에 식당칸으로 내려왔다.
하나라도 빠지지 않고 눈에 담으려는 여행자들이 모두 위에 몰려있는 동안 식당칸에 있는 사람은 나와 노부부뿐이었다.
라면을 먹으며 식당칸 창문으로 경치를 즐기는 것이 꽤 아늑하고 즐거워서 이후로는 편하게 앉아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나름의 시간을 즐겼다.
페리를 타고 가는 동안 카약 보트로 줄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봤는데 몹시 부러웠다.
저렇게 몸으로 뭔가를 헤쳐 나가면서 둘러봐야 피부로 느껴지는 게 많을 테다.
피오르드는 페리보다 직접적인 활동을 해야 조금이라도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듯하다.
트레킹으로 고지대까지 걸어 올라가서 내려다봤을 때 대지가 솟아나고 갈라진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피오르드는 빙하가 만든 골짜기에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여 바닷물이 침입한 것이다.
땅이 솟아난 것이 아니라 패어있는 부분에 물이 차오른 것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언젠가 땅이 솟아나 갈라진 틈에 빙하가 얼었던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플롬에 어딘가에 올라가면 피오르드를 내려다보고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지만 그때는 왠지 내가 좋아서 가기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그곳에 가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반발 심리로 가지 않았다.
구드방엔을 떠나 본래의 목적지 Laerdalsoyri로 향하는 길에 내비게이션과 구글이 안내하는 E16 도로를 무시하고 샛길로 핸들을 틀었다.
여행자들의 정보를 참고하여 아름다움이 가득하다는 내셔널 루트로 가기 위함이다.
그곳에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다.
도로변에 정차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작은 감동에 휩싸였다.
정차 중임을 표시하기 위해서 깜빡이를 켜 뒀는데 구조 신호로 생각한 여행자가 지나가면서 차를 멈춰 세우고 괜찮냐고 물은 일도 있었다.
그때 보닛에 앉아 한참 동안 풍경을 감상하던 중이었기에 당장 어떤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괜찮다며 웃어 보냈다.
자연이 너무 대단하지 않냐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처음 보는 지형과 온통 초록색으로 뒤덮인 미지의 세상 곳곳에 눈이 녹지 않고 쌓여있으나 여전히 여름의 노르웨이였다.
시간상으로 늦은 밤에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해가 늦게 지는 것을 이용하여 마음껏 정차하고 길가에서 책을 읽은 탓이다.
연수원을 닮은 형태의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차리기 위해 쌀과 스팸, 고추장을 챙겨 왔다.
Trolltunga에서 어머님이 챙겨주신 반찬으로 연일 행복한 식사를 이어가고 있다.
최대한 끓여서 졸이고 불린 재스민 쌀밥에 스팸을 잘게 부서뜨려서 섞고, 고추장을 비비는 정도로 한 접시 가득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식당에는 4인의 인도 가족이 여행을 왔는지 음식을 만들고 있었고 강황 가루가 뿜는 카레향이 아찔하게 풍겼다.
카레는 마음 깊은 곳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있다.
카레를 만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나는 어떤 방식이던지 거칠고 진한 카레가 좋다.
향긋한 재스민 쌀과 카레의 조합을 생각하니 입안 가득히 군침이 돌았지만 나의 소울 푸드는 눈앞에 있는 한국 반찬이다.
꼬마 숙녀는 나와 내가 먹는 밥이 신기한 모양인지 다가와서 말을 걸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다른 가족들도 내게 편히 다가와 함께 식탁에 앉았고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혼자 여행을 다니는 내가 신기했나 보다.
나는 인도 아버지들에게 인기가 많다.
언젠가 이 이야기가 인도에 도착하겠지만 인도에서도 여러 아버지들에게 붙들려 질문을 많이 받았다.
대체로 질문은 대동소이한데 내 인생이었다.
어떤 것을 배우고 어떤 전공을 선택하고 무슨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언제 세계여행을 시작했는지 그런 것들 말이다.
모든 결과물의 행적을 궁금해했다.
이유나 과정에 대한 문답은 하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많은 대화 중 이공계를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한 이야기만을 콕 집어낸 그들은 몹시 열광했고 어떤 부분에서는 나보다 내 삶을 더 존중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이룬 것에 우쭐하면서 동시에 입이 썼다.
내면에 품은 어떤 것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과정을 확인하고 싶어 하고 그 과정의 결과물인 나를 통해 자녀가 공부를 더 열심히 하도록 훈계하고 싶어 했다.
결국 이것이 나에게 열심히 질문을 던진 주된 목적인 듯했다.
자녀의 훈계로 이어질 때면 민망해서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세 얼간이>가 인도에서 제작된 것은 현실의 고증인 셈이고, 그 영화에 공감하는 나도 동일한 현실을 살고 있다.
식탁에 앉은 아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나는 이렇게 인생을 걸고 청춘의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내 인생이 타인에게 전달하는 교훈이 학교 성적을 높여야 하는 것이라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은 누구의 삶인지 한번 입을 열면 둑이 터지듯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끝내 아무 생각도 흘리지 않았다.
노르웨이에서 자동차 여행을 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장실이고 다른 하나는 주유다.
'화장실이 어디엔가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다가는 정말 운전이 다급 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미 수차례 당한 터라 웬만해서는 수분 섭취를 최소한으로 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자연 방뇨하고 있다.
늘 마음에 죄책감이 들고 부끄러워서 숨을 장소를 찾는 것도 일이다.
화장실은 마음을 비운다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만 주유의 경우는 다르다.
주유 경고등이 켜지면 조바심이 나고 식은땀이 흐른다.
조난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기름이 반 정도 남았을 때 주유할 곳을 지나치면 여지없이 경고등에 불이 들어올 때까지 주유소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데 나는 특히 그렇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 탓도 있다.
보이는 주유소마다 들러 주유를 하면 되는데 왠지 1만 원씩 계속 주유하는 것이 습관 되지 않기도 했고, 주유를 반복하다 보니 나름 합리적인 가격의 기준이 생겨서 비싼 곳은 지나치게 된다.
지나친 후에 오랜 시간 주유소를 발견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주유 경고등이 켜지는 상황이 온다.
경고등에 불이 들어오면 이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집중력으로 연비 운전을 해야 한다.
중립을 이용해서 제동거리를 최대한 늘리고 브레이크는 거의 잡지 않았다.
차가 정말 멈출뻔한 상황이 몇 번 있었다.
그래서 주유소를 발견할 때마다 '지금 채우지 않으면 언제 채울 건데'라고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채우지 않으면 언제 채울 건데'.
삶이 이와 마찬가지라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지를 묻다가 나라는 차를 멈춰 세웠다.
돌격대가 없는 동안에는 내가 방을 청소했다. 지난 일 년 동안 방을 청결하게 하는 것은 내 습관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돌격대가 없을 때는 내가 그 청결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매일 방바닥을 쓸고, 사흘에 한 번은 창문을 닦았으며, 일주일에 한 번씩 이불을 내다 널었다. 그리고 돌격대가 돌아와서 "와, 와타나베! 어찌 된 일이지? 이거 굉장히 깨끗하잖아." 하고 말하며 칭찬해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대학교 신입생 1년을 기숙사에 지냈지만 룸메이트에 대한 많은 기억은 없다.
1학기, 2학기 두 번에 걸쳐 다른 방 다른 룸메이트 선배가 있었는데 한 명은 통통했고 한 명은 홀쭉했다.
그들의 이름도 학과도 기억나지 않지만 두 번 다 좌측 책상, 2층 침대를 내가 사용했던 것은 기억한다.
1학기는 매일 놀았기 때문에 건이 집, 진우 집에 잔 날이 기숙사에 잔 날 보다 많았고 2학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늘 룸메이트가 나를 그리워했다.
수차례 '오늘은 들어오니'라고 문자가 왔지만 들어간 적은 많지 않다.
외박계를 무한대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숙사였다.
이모집, 고모집, 본가 방문을 돌려가며 사유를 제출했다.
기숙사에 통금이 있어서 0시에 문을 닫고 5시에 문을 열어주니까 밖에서 놀다가 5시에 문이 열리면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아침에 잠들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일어났고, 일어나면 당연히 룸메이트가 없었다.
부딪힐 일 자체가 없으니 몹시 평화로운 기숙사 생활이었다.
룸메이트들은 정돈을 잘하는 사람들이었고 난 생활 패턴이 단순하고 짐 자체가 워낙 적어서 어지럽힐 것이 없었다.
방은 늘 단정한 상태를 유지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주 깔끔하진 않았다.
새벽에 들어와서 느지막한 시간에 일어나면 이따금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휴지통을 비웠다.
기숙사 문이 닫힌 뒤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사다리를 이용해서 담을 넘었다.
외박하지 않으려고 결심했다가 야식에 소주 한잔 하자는 유혹을 못 버틴 날이 그랬다.
그런 날은 보통 아영이네 불닭집을 갔다.
2학기 개강을 앞두고 고민 사거리에 불닭집이 오픈한 날부터 아영이네는 아지트 중 한 곳이 됐다.
넘어갈 수는 있지만 돌아오지는 못할 담을 넘고 나면 꼼짝없이 5시까지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 집에 자야 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며 졸았다.
통금이 없었다면 기숙사에 들어와 자는 날이 더 많았을 것이다.
가끔 애들과 술 약속이 없을 때는 저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때였는데 그런 날에 기숙사에 가만히 있으면 내가 대체 무슨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무엇을 해야 이 시간을 잘 보내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만 같았는데 일상에 특별한 일은 어느 것도 없었다.
간간히 봉사활동을 하는 동아리 선배들과 미팅을 하고 봉사 활동을 갈 때는 그나마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며 룸메이트와 한 방에 있던 날도 딱히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글을 쓰며 생각해보니 그들이 많은 것을 감수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 한쪽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면 그렇다.
학기 내 얼굴을 마주치기 힘들었던 룸메이트는 둘 다 얼굴을 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나보다 학년이 높은 룸메이트 들은 시험기간에 밤새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듯했다.
늘 1학년인 내 시험이 먼저 끝났고 그때는 콩알만큼 공부한 것을 가지고 종강의 기쁨을 크게 누리며 밤새 놀았다.
학교에 있는 모두가 종강할 때까지 그랬다.
마지막 시험이 종강과 같은 기숙사 대학생들은 대부분 서울을 떠났고 방에 들어가면 비워진 룸메이트 자리만 남아있었다.
작별 인사는 문자로 나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