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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훈 Oct 30. 2022

찬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노르웨이 트레킹

 45도가 넘는 경사의 바위 산을 기어이 올라갔다.

 체감은 70도의 가파름이었다.

 하나의 거친 암벽을 타고 정상에 올라서자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또 하나의 암벽이 서있었다.

 신음이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다부지게 올라갔다.

 이른 아침 싱그러운 산보와 같은 트레킹을 상상했던 나에게 불쑥 다가온 거친 현실이었다.

 대체 노르웨이 3대 트레킹이라는 말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트레킹은 무엇이고 등산과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트레킹을 명명한 이들은 적어도 이 트레킹 코스에 등산화 추천을 해줬어야 했다.

  미끄러움 방지를 위한 밑창이라거나 충격 흡수를 위한 탄탄함 따위는 없는 내 뉴발란스 러닝화는 가벼운 게 최대 장점이어서 오로지 체력과 순발력으로 올라가야 했다.

 위태로운 구간마다 잡을 수 있는 밧줄이 있었으나 그마저도 안전하진 않았다.

 온전히 기대면 위험해서 밧줄을 잡고도 몇 번 미끄러져 넘어졌다.


 Kjeragboltn는 Kjerag 산에 있는 돌이란 의미다.

 이곳에 오고 싶었던 이유도 그 돌 때문이다.

 언젠가 암벽 사이에 낀 돌 위에서 발가벗은 남자가 돌아서서 만세하고 있는 포스터를 보고 무한한 자유를 느꼈다.

 이후 줄곧 이곳에 오고 싶었다.

 도전, 모험, 자유를 담은 사진 속 공간에 가면 나도 그러한 것을 얻을 것이라 상상하면서.




 트레킹을 시작하기 전 아침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잠에서 깼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침구는 몹시 부드럽고 푹신해서 기분 좋은 잠자리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곤히 잠들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것의 반복이 많다.

 몸을 많이 움직이고 스트레스가 없는 탓이다.

 여행하는 동안에는 내내 신체가 이완되어있다.


 주섬주섬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왔을 땐 안개가 걷히고 온전한 협곡의 형태가 눈앞에 드러나 있었다.

 양 옆으로 끝없이 늘어선 협곡의 벽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 앞에 선 스스로가 매우 작은 존재로 느껴졌다.

 살면서 나라는 존재를 세상의 일부로 자각한 경험이 많지 않기에 우두커니 서서 전율을 느끼다가 돌아섰다.

 Kjeragboltn 트레킹은 저 협곡의 벽 위로 올라가는 여정이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꾸준히 두 시간을 걸었을 때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피오르드의 일부이고 협곡을 이루는 절벽의 상단에는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보기 드물고 외계 행성과 같은 느낌이다. 

 Kjeragboltn, 처음 보는 광경은 상상처럼 대단하지 않았다.

 바위틈에 낀 바위 딱 그 정도.

 잠시 후 그 바위가 내가 올라온 높이만큼 허공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멋지고 경이로운 것을 보고, 사진을 남길 수 있는 것은 큰 영광이지만 그 영광스러운 순간이 죽음과 가깝다고 누구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바위 쪽에 도착한 순서대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섰다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슬렁슬렁 해졌다. 

 앞서 산을 올라온 사람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물어서 최선을 다해 찍어줬다.

 그에게 내 카메라를 맡기고 나도 줄을 섰다.


 차례가 다가오고 바위 앞으로 다가갈수록 바위 밑으로 상상할 수 없는 높이의 허공이 보였다.

 바위에 오른 사람이 떨어질 수도, 바위 자체가 떨어질 수도 있다.

 그 열린 가능성이 주는 감정이 몹시 복잡했다.

 혼자인 데다가 이런 상황을 전혀 생각지 않았기에 불안함과 초조함을 누구에게 나누고 기댈 수도 없었다.

 포스터를 보고 내가 기대했던 것은 이 장소를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저 바위에 올라서는 것이었다.

 사진 속 그 남자는 어떻게 저기에 옷을 벗고 올라가서 뒤돌아 만세 포즈를 하고 서있었을까.

 불안함, 초조함, 긴장이 뒤섞여 감정의 파도를 타는 동안 차례는 다가왔고 끝내 눈 질끈 감으며, 해볼 건 다 해보자 싶은 마음으로 조심스레 바위 위로 기어서 올라갔다.

 고소 공포증이 있어서 높은 곳을 생각하면 손에 땀이 나고 어지러워서 바위에 오르는 동안 밑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다.

 그 높이 위에 조막만 한 마음으로 앉았다.


 차마 일어설 용기는 나지 않아서 그 자세 그대로 사진을 부탁한 사람을 바라봤다.

 그가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어줬기에 나도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이대로 도망가려는데 그가 스탠드업을 외쳤다.

 일어나 보라고 괜찮다고.

 잠시 망설였지만 역시 안될 것 같다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안될 것 같다고 손사래 치면서도 ‘이왕 왔는데,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라는 미련이 남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한 번의 용기와 즉각적인 실행이 이번 세계여행을 시작하면서 되뇐 주문 같은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용기가 필요했다.

 그에게 일어나 보겠다고 말하고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누군가의 작은 박수가 들렸다.

 긴장으로 굳어있는 몸의 어떤 상태를 유지한 체 손을 하늘로 뻗어 포즈를 취하고 다시 한번 용기를 주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몸을 세우고 사람들의 미소가 눈에 들어오자 스스로 해냈다는 어떤 느낌과 자신감이 생겨서 미소를 지으며 올라설 때보다 여유롭게 바위를 내려왔다.


 카메라를 받아 들고 다시 그 바위를 보면서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맙소사 내가 저기에 올라갔다니’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을 혼자 여행하기 때문에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온전히 스스로를 마주한다.

 외롭지만, 외롭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순간들이다.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있었다면 포기했을지도, 용기 있는 척을 하며 올라섰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의지할 곳 없는 경험이 혼자 하는 여행 동안 있다.

 서울 자취방에서도 감정을 의지할 곳 없이 혼자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이 있었지만 많은 것이 얽히고설킨 거주지의 일상은 비행기 이륙과 동시에 모든 사슬로부터 벗어나 '여행' 하나만을 계획하고 만들며 느끼는 감정과 달랐다.


 내가 넘어온 큰 바위산은 협곡 상단의 아주 작은 돌기에 불과하다.

 수직의 절벽 아래는 차마 서서 볼 용기가 없어서 기어가서 엎드린 채로 내려다봤다.

 어릴 때부터 높은 곳에 있을 때면 아래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가 있다.

 난간에서는 몸이 실제로 기울어서 특히 난간을 기피하게 된다. 

 정말 까마득히 높아서 엎드려 있는데도 긴장과 아찔함이 몰려오고 아득한 높이에 마냥 경탄하게 된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번 가파른 경사 앞에 다다르자 막막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벽에 기대어진 사다리를 올라갈 때 올라가는 자세로 내려오지 반대로는 엄두가 안 나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올라와봤기에 내려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하행했으나 세 번을 미끄러져 넘어졌다.


 결과적으로 재밌는 트레킹 코스였다.

 왕복 4시간가량의 적당한 거리이고 가는 과정과 목적지가 지루하지 않다.

 만들어진 길보다는 자연 그대로를 각자의 방법으로 자유분방하게 올라가는 묘미도 있다.

 사방으로 경로가 트여있지만 사람들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여기저기 돌에 'T'라고 페인팅이 돼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행자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돌에 올라갈 수 있고, 피오르드 벼랑 끝에 고개를 내밀 수 있다.

 포스터의 장면처럼 멋진 사진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둥근 바위 위를 오르던 경험은 깊게 남아서 지금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고, 앞으로도 뒤로도 몸이 기울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게 돼서 글을 쓰는 지금도 손에 땀이 배어 나온다.

 이런 경험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값지다.


 페리를 타고 피오르드를 따라 이동한 뒤 jorpeland로 간다.




 미도리의 요리 솜씨는 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전갱이 초절임에, 다시 국물로 간을 한 두툼한 계란말이, 손수 만든 시금치 조림, 가지 조림, 순채 장국, 버섯밥, 거기다 단무지를 잘게 썰어 깨소금 뿌린 것을 듬뿍 곁들여 내놓았다. 양념은 산뜻한 간사이풍의 싱거운 맛이었다.

 “아주 맛있는데.” 하고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저렴한 가격에 아늑한 숙소를 구했다. 

 짐을 풀고 속옷과 양말을 손빨래해서 라디에이터 부근에 널었다.

 라디에이터가 있는 곳에서는 습기를 머금은 옷이 자는 동안 가습기 역할을 해주고 자고 일어나면 빨래가 바짝 말라있어서 좋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일본 가정식을 소박하고 맛깔나게 설명해둔 탓에 입안 가득히 군침이 돌았다.

 숙소 창문에 걸터 앉아 포장해온 연어 초밥을 열었다.

 윤기 나는 쌀밥에 간이 잘된 샤리는 감동스러웠고 네타로 사용된 노르웨이산 연어 또한 좋았다.

 창밖에는 하얀 배들이 돛대만을 세운채 항구에 정박해있었고 아주 느릿하게 어둠이 오고 있었다.


 초밥을 사서 숙소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 가족이 무거운 짐을 내리는 것을 봤다.

 반가워서 인사를 하고 짐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옮기는 것을 도왔다.

 노르웨이에 온 뒤로 처음 보는 한국인들인데 jorpeland가 사람들이 찾지 않을 곳이어서 더 의외의 만남이었다.

 가족 모두 등산을 좋아해서 아들이 휴가를 사용하고 그동안 번 돈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고 한다.

 아마 3대 트레킹 정복이 목표인 듯했다.

 짐이 범상치 않았다.

 노르웨이의 아름다움을 보는 동안 부모님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그 모습이 무척 좋아 보였다.

 노곤한 몸으로 일찍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 전까지 부모님을 생각했다.


 늘 웃는 모습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아들"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떠올린다.

 나의 부모는 천사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가졌다.

 그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애잔하다.

 호강시켜드리진 못해도 고된 삶은 살지 않게 해드리고 싶었는데 내 인생을 찾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내 부모의 삶을 잠시 나에게서 떨어트렸다.

 2년간 우리 가족을 짓누르고 있던 아빠의 혹을 제거하고 6개월 후 아산 병원 홍석준 교수가 수술 잘 됐고 전이가 없다고 진단 한 날부터 나는 맹렬하게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며 2년간 주말을 투자했던 중앙대 상담심리학과 과정이 종료되기 전에 고려대와 가톨릭 대학교 석사 과정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둔 채 세계여행을 결심했다.

 여행 자체를 위한 계획은 크게 없었으나 이 여행을 결심하기까지 모든 과정이 내게 준비였다.

 이런 나를 보고 부유해서 할 수 있는 결정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이 삶의 우선순위에 있지 않던 내 삶의 형태를 보고 할 수 있는 착각이었다.

 우리 집은 단 한 번도 부유해본 적이 없다.

 내가 바로 서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어야 내 부모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예전에 친한 선배 하나가 잔뜩 취해서 내게 야이 거지새끼야 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취한 사람과 드잡이 하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참으로 가진 게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입이 쓰고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도 그 말에 부인할 것이 없었다.

 그 형이 어떻게 내 사정을 알고 한 소리인 줄은 모르겠다.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가진 돈을 모두 끌어모아서 학자금 대출을 갚았다.


 그럴수록 더욱 마음을 부유하게 함으로써 삶을 살아왔다.

 가진 게 없어 자꾸 움츠러들고 삶에 짓눌리는 부모님께도 우리가 재산으로 부유하지 못해도 상관없으니 마음이 부유한 가족을 만들자고 했다.

 우리가 건강하고 삼시세끼 밥을 챙겨 먹을 수 있고 사랑이 넘치는 가족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이런 말과 상관없이 너무 늦지 않은 언젠가 호강시켜드릴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다 보면 이 여행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의심이 고개를 들고 어깨가 무겁지만 그런 무게와 어두움이 여기에 깃들어선 안된다.

 빠르게 고개를 털어 날려 보내고 눈을 감았다.




 Preikestolen 역시 3대 트레킹 장소 중 하나다.

 전날 Kjeragboltn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곧장 암벽 등반의 고됨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Preikestolen는 평이하게 느껴졌다.

 잘 정비된 길을 따라서 왕복 4시간이 소요됐고 나무가 우거진 풍경을 보면서 걷는 맛이 있었다.

 길 끝은 피오르드 절벽이었는데 돌출된 부위에서 피오르드가 만든 협곡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근사했다.

 이 부분을 Pulpit Rock이라 부르고 '꼭대기 부분이 평평한 604m 높이의 절벽에서 탁 트인 전망과 산악 등반을 즐기기 좋습니다.'라고 구글에서 설명하고 있다. 

 산이 아니라 수직으로 깎아 내려진 604m 절벽이다. 

 그곳에 도착한 이들은 모두 멋진 사진을 찍기 위해 그 절벽 끝에 앉거나 선다.

 어떤 의미에서 내가 생각하던 트레킹과 일치했지만 이미 전날 경험을 통해 노르웨이의 트레킹이란 거칠고 날 것이어야 한다고 인식에 변화가 있었다.


 3대 트레킹 장소가 인기 있는 명소인지 끝 지점에서 한국인 여행자 두 명을 만나서 서로 원하는 만큼 사진을 찍어줬다.

 사람마다 사진을 찍는 구도가 다른데 한국인들만큼 보편적으로 센스가 좋고 원하는 만큼 찍어주는 민족은 없다.

 Pulpit Rock도 좋지만 그곳이 내려다 보이는 곳까지 조금 더 올라가서 전체를 눈에 담는 게 더 좋았다.

 다들 몸을 돌려 돌아갈 때도 나는 그곳에 앉아 있다가 안개가 자욱해서 더 이상 먼 풍경이 보이지 않을 때 일어났다.


 시계방향으로 큰 원을 그리며 이동하는 여행 경로 중 좌측 하단부에 계속 언급하고 있는 3대 트레킹 장소가 몰려있다.

 마지막 트레킹 장소인 Trolltunga에 가기 위해 근처 마을인 Odda로 이동했다.

 첫날 총 10시간의 이동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인내했기 때문에 4시간 정도의 운전은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멋진 풍경이 있는 곳에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고,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하거나 몇 장의 책을 읽었다.   


 Odda는 트레킹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마을과도 같았다.

 트롤퉁가 스튜디오라는 호스텔에 도착하니 이전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28km, 왕복 8-12시간이 걸리는 Trolltunga 트레킹은 각오가 필요하다.

 그런 각오로 장비를 점검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미 트레킹을 마치고 지친 몸을 달래면서 다른 여행자들에게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여행자도 있었다.

 절뚝이며 샤워장으로 향하는 여행자도 있었고, 포기하는 여행자도 있었다.

 그런 소란함 속에서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재스민 쌀을 씻어서 냄비에 안쳤다.

 밥심으로 올라갈 생각이다.

 특별한 장비도 없고 뒤로 물러설 생각도 없다. 러닝화가 통기성을 위해 메쉬 소재로 되어있어서 비만 안오길 바랄 뿐이다.

 재스민 쌀은 찰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죽을 끓인다는 생각으로 물을 넉넉하게 넣었는데 주효했다.

 핀란드에서 받은 반찬을 봉투에서 꺼냈다.




 세상에 모든 것은 연결돼있는 걸까.

 트레킹 시작점인 tyssedal에 주차를 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누군가 달려와서 붙잡는다.

 돌아보니 jorpeland에서 만난 한국인 가족이다.

 반가워서 인사를 건네니 자신들의 차를 타면 상부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며 일단 차에 타라고 한다.

 어리둥절해하면서 차에 올랐다.

 하부 주차장에서 상부 주차장까지 4km 거리인데 상부 주차장에 갈 수 있는 차량이 한정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기다렸고, 이제 막 상부 주차장 출입이 오픈되려 하는데 지나가는 뒷모습이 왠지 나인 것 같아서 달려왔다고 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연거푸 전했다.

 나름 새벽에 일어나서 살뜰하게 밥까지 챙겨 먹고 나왔는데 이런 정보는 하나도 없이 밥심만 챙겼다.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트레킹인데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왔냐며 먹을 것은 있냐는 연이은 물음들이 수다스럽고 따뜻했다.

 상부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트레킹과 연관 없고, 삭막한 자갈길을 굽이굽이 4km 올라가야 한다.


 등산복, 등산화, 스틱과 가방, 간식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춘 가족은 함께 가자고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Trolltunga를 정복할 수 있었다.

 가는데 세 시간 반, 오는데 세 시간 반, 정상에서 한 시간 총 여덟 시간이 소요됐다.

 함께 올라가자고 하셨는데 뒤쳐지거나 짐이 되고 싶진 않아서 정말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하산하는 길에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발도 막 딛고 신발도 헐렁한 운동화인데 몸으로 이겨내 버린다며 젊음이 좋긴 좋다고 하셨다.

 그저 모든 게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Trolltunga은 트롤의 혀라는 뜻이다.

 정상의 절벽 일부가 혀가 내밀어진 모양으로 허공에 돌출돼있다.

 트레킹은 이 돌출된 바위 위에 서는 것을 목표로 했다.

 오랜 시간 고생해서 도착한 만큼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한 명씩 Trolltunga 위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는다.

 나 역시 그 위에서 앉고 서고 엎드려서 사진을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오던 길 중에 좌우로 호수가 내려다 보이던 지점이 더 좋았다.

 그곳은 경사면에 잡초들과 각종 야생화가 피어있어서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경 같았다.

 몹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하부 주차장까지 내려왔을 때 해는 매우 쨍쨍했고 발은 피곤하지만 몸은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나도 부모님과 함께 오고 싶다고 말을 건네니 형은 한번 같이 와보면 다시는 그런 생각이 안 들 거라고 했다.

 가족 모두에게 거듭 깊은 감사 인사를 드리고 남은 여행도 잘 마무리하시길 응원하며 돌아서는데 어머니께서 자신들의 여행은 이제 마무리됐다며 작은 가방에 참치, 김, 스팸, 햇반, 깻잎 통조림, 고추장을 챙겨주셨다.

 어머니께서 첫인상이 너무나 좋았다고 하셨다.

 팔을 잡으시며 건강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라고도 하셨다.

 모든 게 돌고 도는 느낌이었다.


 곧장 베르겐으로 이동하려다가 이곳에 하루 더 머물면서 경험을 갈무리하고 몸을 회복하기로 했다.

 하루에 한 곳씩 3일 동안 트레킹을 했으니 모든 것이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다.

 속도 조절을 하는 게 좋겠다.

 휴식에는 1인실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호스텔로 돌아가지 않고 저렴한 호텔을 예약했다.

 늘 그렇듯 먼저 빨래를 해서 널고, 햇볕 아래 앉았다.

 찬란한 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방학에 들어간 지도 이미 몇 주일이 지났기 때문에, 아직까지 기숙사에 남아 있는 건 우리 둘 정도였다.

 날이 저물자 기숙사는 휑하니 마치 폐허처럼 느껴졌다. 국기가 게양대에서 내려지고, 식당 창문에는 전등이 켜졌다. 학생 수가 줄어든 탓에 식당 전등은 늘 반 정도만 켜져 있었다. 오른쪽 절반은 꺼지고, 왼쪽 절반만 켜져 있었다. 그래도 희미하게 저녁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크림 스튜 냄새였다.

 누군가 걷어들이는 것을 잊어버린 흰 셔츠만 빨랫줄에 널려, 무언가의 허물처럼 해 질 녘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약간 이지러진 하얀 달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오른쪽에는 신주쿠 거리의 불빛이, 왼쪽에는 이케부쿠로 거리의 불빛이 보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선명하게 빛의 개울을 이루며 거리에서 거리로 흐르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서로 어울린 부드러운 울림이 마치 구름처럼 희미하게 거리 위에 떠돌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중


 내 스무 살 대학시절에 많은 날이 지나가는 불빛과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학교로 나가 강의를 듣고 공강 시간에는 도서관에 가거나 친구들과 밥을 먹었다.

 마지막 강의가 끝난 뒤 저녁까지 공백 시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석양이 물들면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열아홉 살과 스무 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다.

 내 청춘의 하루가 이렇게 허무하게 흘러가는 것을 믿을 수 없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있다 보면 여섯일곱 시쯤에 친구들이나 선배들과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희희낙락 거리며 서로를 놀리다가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로 하루가 끝났다.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으나 어디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정의할 수 없었다.

 그저 정신 차려보면 늘 고민 사거리에 서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일단 다들 그 사거리에 서서 고민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그곳이 청춘의 갈림길 같았다.

 늘 새벽 세시에는 ‘청춘을 적신다’에 있었다.

 그 시간까지 문을 여는 유일한 술집이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청춘을 적신다’가 사라진 것을 보고 시절의 일부를 상실한듯한 느낌을 받았다.

 찬란한 시간은 계속 연속되고 있었으나 늘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친구 놈들은 신기하게 만났다.

 오티에 가서 건이랑 진우를 만났고, 새터에 가서 록이를 만났다.

 나를 매개로 넷이서 뭉쳐 다니다가 민이와 구디를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까지 이렇게 여섯이 가장 친하고 한심하다.

 첫 개강도 하기 전인 2월, 오티가 끝나고 술집에 쭈뼛거리며 모인 아이들은 아직 고등학생티를 못 벗은 순박한 얼굴로 앉아서 많은 선배들과 친구들을 사귀고 대학의 낭만을 시작할 기회라고 여겼던 것 같지만 나는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온통 사내놈들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느 테이블이든 그곳에 함께 앉은 사람과 놀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마산에서 온 진우, 영건이는 그렇게 만났다.

 나와 생각이 통했는지 다른 테이블을 아랑곳하지 않고 셋이서 술을 마시고 따로 나와 노래방에서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불렀다.


 새터에 갈 때쯤 나는 완전 고삐가 풀려있었다.

 수능이 끝난 뒤 아버지 김철수 씨에게 속아 배추 아르바이트를 하고 모은 돈이 있었고, 지난 6년간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신입생 1년은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만큼 놀겠다고 선언하고 온 길이었다.

 새터라는 명칭의 엠티에서는 신입생들이 5개의 조로 나뉘었고 조당 스무 명 정도의 친구들이 있었다.

 내가 속한 조는 순박한 햇병아리들과 1명의 양아치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특별히 재밌을 것이 없었다.

 남자가 18명에 여자가 2명인 성비가 앞으로 4년간 내가 속해있는 학과의 현실이라는 것에 마음이 어지러울 뿐이었다.

 순박한 햇병아리들은 그나마 양아치 친구가 재밌게 해 주길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고등학생 양아치가 대학생 양아치가 됐을 뿐 그도 껄렁껄렁하고 윽박지르는 것을 제외하면 대학생으로서 어떻게 친구들과 어울려 놀아야 하는지는 몰랐다.

 지지부진한 시간이 지나고 저녁에 술이 들어가면서 비로소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나 둘 취해가고 생애 첫 술을 마시는 아이도 있었다.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은 이야기였다.

 헤롱이는 애들과 희희낙락 거리다가 방을 돌며 친목을 다지던 학생회 선배들을 맞이하고 술을 받고 배웅도 했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를 잡고 토하다 잠든 록이를 구출하고 방광이 한계에 달한 아이들도 구원했다.

 음주에는 가무가 따라야 한다는 게 당시 나의 지론이었던지라 취한 아이들을 데리고 춤추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는 불을 끄고 누워서도 낄낄거리며 한참을 더 노래를 불렀다.

 늘 내가 선창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엔 제대로 청춘을 통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밤을 보내고 나니 같은 조였던 친구들 사이에선 일약 스타 덤에 올랐다.

 아이들의 반응과 상관없이 나는 시커먼 남자애들 틈에서 더 놀 생각이 없었다.

 뭔가 내 스무 살에는 특별한 일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대학생활에 뭔지 모를 낭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개강하고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낭만은 동아리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진우, 건이, 록이와 교내의 동아리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는 그것에 열정적이었으나 모든 대자보를 읽고 이 학교에 낭만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럴 바에야 운동이나 하자 싶었다.

 마침 진우는 인간병기로 만들어준다는 태권도 동아리 대자보를 맘에 들어했다.

 뭐든 좋다는 생각으로 신청서를 제출하기 위해 태권도 동아리로 가던 길에 도복을 입은 청년들이 달려 나와 잔디밭에서 발차기하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딴에는 신입 부원을 모집하기 위한 퍼포먼스였겠지만 내 눈에는 대학생활 동안 가서는 안될 곳을 본 느낌이었다.

 결국 우리가 간 곳은 봉사 동아리였다.

 새터 때 방을 찾아온 학생회 선배가 봉사 동아리 임원이었다. 그때 선배가 동아리를 권유하며 했던 말 중 "봉사만 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사실 어디여도 좋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 선배가 아직도 카톡 단체방에 있으면서 이따금 술 한잔 같이 하는 지영이 누나다.


 여름방학이 되자 친구들과 선배들은 저마다 고향으로 내려갔고 서울에 사는 사람들 또한 학교에 오지 않았다.

 기숙사와 학교, 학교 앞 식당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회색빛 죽은 도시 같았다.

 모든 곳이 휑했다. 무슨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광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타지 생활을 하다 돌아온 아들을 살 찌우기 위해 엄마는 부지런히 집밥을 해서 먹였고 당시 키우던 애완견 해피(갈색과 검은색 털을 가진 귀엽고 순한 요크셔테리어)가 손과 얼굴을 핥고 부비며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 것도 없이 사랑받고 있었다.


 집에서 빈둥거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고등학교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전남대학교 후문이나 시내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분명 그때까지도 우리는 대학생이 되지 못한 고등학생들이었다.

 친구들이 반년도 채 안된 시간 동안 서울말을 배워왔다며 재수 없다고 놀려댔지만 서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며 놀림을 받아온 터라 어이없을 따름이었다.

 스마트폰도 카톡 단체방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이들과 서로 소식에서 자유로웠다.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든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광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등산 꼭대기를 거실 창문을 통해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이 가장 많았다.

 쉬는 날이면 아빠가 창밖을 보던 것과 같았다.


 두 달이 조금 넘는 방학은 빠르게 지나갔다.

 스무 살의 일부가 이런 형태로 지나간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았다.

 방학이 아직 남았을 때 서울로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엄마는 아무도 없는 학교에 빨리 가서 뭐할 거냐고 했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서울로 다시 돌아와서 아무도 없는 기숙사 이층 침대에 누워있을 때까지 모든 것이 기억난다.

 버스가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문이 열리면서 나던 서울의 냄새, 지하철을 찾아가던 길, 흔들리는 지하철, 지하철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지나가는 차와 가로등의 어지러운 불빛, 달달한 서울 김치, 헛헛함과 외로움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주체되지 않던 마음까지 모두.

 내가 굉장히 찬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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