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11월 10일
'너의 온기 - 마이큐'
'High and Dry - Jamie Cullum'
'This Year - Emily King'
창문 밖으로 빛이 어스름할 때 버스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맘때 자주 입는 경량 점퍼 안에 후드가 있는 기능성 점퍼를 겹쳐 입고 보온과 통기성을 갖춘 바지를 입었다.
장갑과 접이식 선글라스, 모자를 챙긴 뒤 편한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선다.
백패킹을 위해 마련한 옷들을 도심에서 입을 때면 극한의 효율과 든든함이 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 공기는 서늘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장갑을 꺼냈다.
잠시 후 초록색 7011 버스가 왔다. 서촌으로 간다.
주말 간 수많은 나뭇잎이 낙하했다.
금호동 은행나무 아래는 노란 잎이 수북했다.
망원동에서 은행이 물드는 것을 기다렸더니 금호동엔 벌써 낙하라니.
어쩐지 많은 것을 놓칠 것 같아서 길을 나섰다.
서촌이 유별난 것은 아니지만 지난 글에서 언급한 잔다리로에 이어 이 또한 추억의 일부로 으레 이 시기 서촌을 떠올린다.
서촌으로 가는 버스 경로는 모두 은행나무였다.
상수역에서 산울림 극장 방향의 와우산로를 따라 은행나무들이 심겼다.
신촌역에서 이대역 쪽으로 이어지는 신촌로에 심긴 은행나무들은 유독 컸다.
이대역에서 이대 쪽으로 내려가는 이화여대길은 좁은 1차선 일방통행길 좌우로 은행나무가 밀집됐다.
지난 4월 글을 쓰면서 가로수 통계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었다.
서울의 가로수는 어떤 나무가 가장 많을까요?라는 2013년 서울시의 글에서 은행나무 41% 버즘나무(플라타너스) 26% 느티나무 11.5% 벚나무 9.4% 그 다음이 이팝나무라고 했다.
이번 가을 도심의 단풍을 보면서 위의 분포를 여실히 느낀다.
다섯 그루 중 두 그루는 은행나무.
열 그루 중 일곱 그루는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
은행나무, 버즘나무, 느티나무를 도심에서 허다하게 본다.
경복궁 서쪽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경복궁역에서부터 청와대 앞까지 850m 효자로에 거대한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제각기 물들었다.
지금이 절정이거나 그 절정을 이제 막 넘어선 듯했다.
궁궐 담벼락과 은행나무가 어우러진 모습을 함께 보기 위해 길을 건넜다.
붙어서 전체를 조망할 재주가 없기에 한 발짝 두 발짝 더 물러선다.
이제 막 시작되는 아침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인적이 드물다.
풍경의 풍성함이 도드라지는 행복 속에서 금세 길 끝에 이르러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담벼락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은 나와 달리 살갗을 드러내고 열기를 발산한다.
그들이 땅을 박차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금세 멀어지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진다.
사진을 찍고 눈에 담길 반복 하며 걷지만 길 끝까지 다시 금방이다.
마침 8시에 문을 연 카페로 들어가서 생각과 감정을 갈무리한다.
커피는 연하지만 차처럼 마시기 부담 없다.
덕분에 연달아 마시는 따뜻한 음료가 몸속을 쉬이 파고든다.
창 밖의 은행나무를 가만히 바라본다.
추천곡은 마이큐의 <너의 온기>, Emily King의 <This Year>, Jamie Cullum의 <High And Dry>
밝거나 어둡거나 느리거나 빠르거나. 가을엔 어느 곡이든 잘 받아들여진다.
아홉 시쯤 되니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담벼락을 따라 걷고, 은행나무 기둥마다 머물러 사진을 찍는다.
그 또한 보기 좋았다. 특히 한복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하면 미소를 띠며 좋아했다.
* 국립고궁박물관 앞 정원에 놀랍게 큰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어느 장소마다 하나씩은 있다던 오래된 나무는 세월의 큰 단위를 쉬이 헤아리는데 그런 나무는 높이뿐만 아니라 펼쳐진 가지의 반경이 압도적이다. 그 정원의 한편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물든 단풍나무 한그루도 있었다.
* 식사를 할까 싶어서 길을 꺽어 들어가니 낮은 건물 위로 은행나무가 솟았다. 길가의 모과는 레몬처럼 노오랗다.
* 봄에도 그러했듯 궁궐의 담벼락과 기와는 자연과 조화가 좋다.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