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11월 중순
'이제 안녕! - 조유리'
'Cinderella - 서리'
만나면 어디 갈까를 고민하던 날이 있었다.
대학교 때는 학교를 마치고 사람들과 만나면 사거리에서 그 고민을 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그래서 그곳은 고민 사거리라고 불렸다.
이제는 특별한 장소를 약속하지 않았다면 카페로 간다.
음료 한잔에 그만한 돈을 사용하는 게 아까운 날도 있지만 대안이 없을 때는 공간 대여료로 생각한다.
더 어릴 때는 편의점에 앉았다.
일단 뭐라도 사서 앉아야 염치 있어서 삼각김밥이나 바나나 우유, 컵라면을 손에 들었다.
물론 그때는 카페나 커피가 이만큼 성행하지 않았고 염치보다 허기가 많던 때다.
편의점에 가지 않아도 어딘가 앉을만한 곳이면 모두 대안 장소였다.
거리마다 앉을 곳이 많았고 의자가 없어도 어디든 엉덩이를 붙일 수 있었다.
엄마는 지저분하다고 했지만 그땐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내 눈에도 지저분한 것이 많아져서 자리를 가려 앉는다.
앉을 곳이 없을 때엔 서거나 걸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버스를 타고 충장로로 갔다.
거리를 걷고 구경하고 스프리스 2층에서 포켓볼을 쳤다.
시절이 그러했는지 거리에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검색을 하지 않으니 선택지는 단순했고 행동 또한 단순했다.
대체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보내지 않아도 못 보낸다 생각한 날이 없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게 유복함이다.
나의 부모님, 나라, 살던 도시, 학교, 친구들, 그때 그 시기 그 모든 게 축복이다.
가방에 책과 노트북을 넣고 무작정 집을 나와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이런 생각들을 한다.
망원로는 강변북로와 망원한강공원으로 연결되는 나들목에서부터 망원우체국 사거리까지 약 1Km 직선 구간이다.
망원동은 이 망원로를 경계로 1동과 2동으로 나뉜다.
도로와 구간 명칭을 만들던 당시에는 망원우체국이 큰 사거리에 있었는데 몇 년 전 망원로 중간쯤으로 이전했다.
우체국은 우편취급국이 됐고, 이전 자리에는 교촌치킨이 들어섰다.
아무래도 교촌치킨 사거리로 명명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래서 망원우체국 사거리엔 우체국이 없다.
이 망원로에도 은행나무가 늘어섰다.
좌측은 은행나무 우측은 플라타너스 반반 치킨처럼.
망원로를 걷는 동안 이제는 물들지 않은 은행나무가 드물단 걸 안다.
여전히 푸른 나무도 있다. 어느 것은 이제 막 물들고도 가지가 앙상하다. 물들지 않고도 앙상한 것도 있다.
이토록 편차가 크다.
그럼 은행나무의 시기는 먼저 물들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즐겨야 한다.
대부분의 것이 푸르더라도 하나가 물들면 그때부터다.
전체나 대부분의 것이 물들기를 기다리기엔 정점의 폭이 좁다. 그리고 곧장 낙하하는 시기다.
은행나무를 쫓아 가을과 겨울에 이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에 조금씩 알아간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흩날리면 온통 분홍빛으로 그게 한해의 낭만인 줄만 알았더니 도시의 풍경을 바꿔버리는 은행나무의 가을이 있다.
큰 존재감.
허다하게 심긴 가로수 분포를 따라 걷는 이들에게, 운전하는 이들에게, 고지대에서 도심을 내려다보는 이들에게 노란 감정을 선사한다.
그대로 망원우체국 사거리를 건너서 성산로를 걷고 잔다리로 초입에 닿는다.
잔다리로를 돌아 합정역을 지나면 희우정로 시작점 벚꽃나무 길이다.
추천곡은 조유리의 <이제 안녕!>. 제목에 느낌표가 붙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서리의 크리스마스 싱글이었던 <Cinderella>.
* 은행나무의 낙하는 무겁고 빠르다. 우수수 떨어진 은행나뭇잎이 거리에 쌓이는 것을 보고 그 위를 걷는다. 가장 먼저 물들기 시작해서 낙하하기에 연약하다 생각한 벚꽃나무는 아직도 그 잎을 달고 있다. 벚꽃나무 아래에 비질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 얼마 전에 추천받은 카페로 갔다. 다행히 나는 커피 자체를 좋아해서 비싼 값을 치르고도 커피 맛에 대한 값어치와 장소에 대한 일종의 사용료를 포괄적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생각하면 커피 맛이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이 크다. 커피 자체를 좋아하기 전에는 분위기나 인테리어, 창밖의 풍경 등을 살펴 들어갈 때가 많았다. 좋은 조건들이 많을수록 좋지만 이젠 늘 커피가 가장 앞이다. 커피, 음악, 책 삼박자가 맞으면 크게 행복하다.
* 담장의 덩굴들도 붉게 물들었다. 주택가 벽을 타고 오르거나 내린 덩굴들은 그대로 벽돌과 동화됐다. 목련나무는 점차 물들어 묘한 노란빛이고, 거리의 관목은 붉게 물들었다. 11월 1일 글에 올린 느티나무는 며칠 전까지 풍성하더니 이제 가지가 앙상하다. 그리고 다시 은행나무를 보고 알았다. 온통 노랗게 변하는 나무의 존재감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 인식과 인지의 힘은 이토록 크다. 관심 갖지 않는 동안엔 몰랐던 세계가 있다. 경험 역시 크다. 작은 생활 반경을 맴도는 동안 서울 도심에 근사한 은행나무 길이 이토록 많은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