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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안톤 May 14. 2020

사랑으로 버무린 닭발

소주와 닭발이 생각나는 밤

닭발 먹고 싶지 않니?  좋아하는 닭발볶음  해줄까?”

어머니와의 통화 끝에는  닭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식을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러하, 마흔이나  자식이 밥은 제때 챙겨 먹는지, 먹고 싶은 음식은 없는지 항상 걱정하신다.  밑반찬도 해주시긴 하지만, 회사 구내식당이나 외식에 길들여진  입맛에 어머니가 해주시는 반찬은 싱겁고 어색하다. 어릴 적부터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을 거의 먹어보지 못한 터라, ‘집밥 그리운 적은 없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괜찮다는 말로 거절을 하지만 ‘닭발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아님에도 거절할 수가 없다.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 대던 , 나에게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태어나서   놀기만 했던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것과,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그것이다. 아버지는 재주가 많은 분이지만,  돈을  버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어렵게 빚을 내어 중장비 기계를 건설 현장에 운반하는 사업을 시작하셨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아버지는 ‘사장님’, 어머니는 ‘사모님소리를 듣게 되었다. 형편도 제법 좋아져 할머니, 동생과 같이 방을 쓰던 낡은 집을 벗어나 내 방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일이 꼬이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고가의 중장비를 옮기던 중 사고가 생하였으며, 아버지와 동업을 하던 지인이 사기를   빚을 떠안게 되었다.  ‘가난이라는 것이 어린 나에게도 느껴질 만큼 우리 집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은 저녁때가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저녁을 먹고 한참을 기다리고, 지쳐 잠이 들어도 부모님의 얼굴은   없었으나, 새벽녘 현관에서 들리는 신발 신는 소리와 화장실에 젖어 있는 슬리퍼를 보며, 부모님이 다녀가셨다는 흔적은 찾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빚을 갚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아버지는 지방의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현장을 일을 하셨다. 어머니는 친척의 도움으로 작은 포장마차를 시작하셨다. 장사는 해본 적도 없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셨다고 했다.  옛날 80년대 동네 어귀에 있던 포장마차였다. 두툼한 파란 천막을 둘러치고 백열등 하나에 의지한 , 곰장어, 닭똥집, 우동 등을 만들어 파셨다.  낮에 봉제공장에서 일을 마치면 곧장 포장마차 장사를 시작하셨다. 묶어  포장마차의 천막을 , 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해물 재료를 손질한다. 우동이나 국수를 팔기 위해서는 멸치로 육수도 끓여야 했다. 재료 손질이 끝나면 나무의자를 펼친  주변을 정리한다.  


80년대 포장마차의 모습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음식을 잘하셨던 할머니로부터 배운 대로 똑 같이 만들어도 ‘손맛 부족한 어머니의 음식은 손님들에게 혹평을 넘어 험한 소리까지 듣게 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취객들이 대부분이니 접시를 엎어버리는 일도 허다하고,  주고 못 먹겠다며 화를 내고 가는 손님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속이 상한 어머니는  번이고 장사를 접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를 기다리다 지쳐 잠든 남매를 보며, 또다시 포장마차로 출근을 하셨던 것이다.

고민하던 어머니는 평소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닭발볶음 포장마차에서 팔기로 결심하셨다. 할머니는 매운 것을  못 드시는 가족들을 위해 적당히 매콤하고 달큼한 닭발볶음을 해주셨다. 할머니의 닭발볶음은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매일 저녁 포장마차를 일찍 정리하고 할머니에게 닭발 손질하는 법과 양념만드는 방법을 배우셨다. 어린 동생과 나는 그저 어머니가 집에 있다는  만으로 너무 행복했다. 나는 어머니를 도운답시고  손과 비슷한 크기의 닭발을 잡고 발톱을 자르는 일을 도왔다. 네 살배기 남동생은 어머니의  뒤에서 또는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어머니의 품에서 나는 냄새를 한 번이라도  맡으려고 버둥거리곤 했다.

수도 없이 많은 닭발의 발톱을 손질하고 양념장을 만들고 버리기를 반복했을쯤,


애미야, 이만하면 내다 팔아도 되겠다

봉제공장에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하신 어머니는 드디어  메뉴 ‘닭발볶음  준비를 하셨다. 집에서 정성스레 손질해온 닭발을 솥에 담고 끓는 물에 10여분 정도  삶아준다. 이때 잡내를 없애기 위해 소주를 넣어 같이 삶는다. 물기를 제거한  달궈진 프라이팬에 삶아진 닭발을 넣고 간장 넣어 간장이 닭발에  배도록 휘휘 저어가며 한번  익혀준다. 그 후 양념장과 마늘, 생강 등을 넣고 다시 한번  익힌다. 이후 닭발 커다란 대야에 옮기고 선풍기를 틀어 빠르게 식힌다. 찬바람에 닭발이 빠르게 식으면서 쫄깃함이 살아나고 양념이   스며든다. 손님에게 내어 드릴 때는 프라이팬에 닭발을 살짝 데운  청양고추를 몇 조각 올리고, 참기름과 통깨를 뿌려주면 완성된다. 어머니의  메뉴는 금세 손님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적당히 매콤하고 달큼하며 감칠맛이 좋아 술안주로 제격이었다. 차츰 장사가  되고 단골도 생기자 어머니는 봉제공장을 그만두고 포장마차 장사를 본격적으로 하셨다.




모처럼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딸을 위해 어머니는 아침 일찍 시장에서 닭발을 사 오셨다. 시장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닭발 지만 어머니는 항상 손질이 되지 않은 닭발을 사 오신다. 가격도 저렴할뿐더러, 직접 손질을 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녀가 마주 앉아 주방용 가위를 하나씩 들고, 닭발의 발톱을 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형편이 조금 필 때쯤, 포장마차 장사를 그만두셨다. 밤손님을 상대하는 것이 아무래도 힘드셨던 모양이다. 봉제공장으로 다시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제  만드는 옷이 없을 정도로 베테랑이 되었다. 무심코 어머니의 손을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어머니는 못생긴 손을 뭐하러 보냐고 핀잔을 주신다.  하얀 어머니의  마디마디에는 닭발처럼 깊은 주름이 파여있었고,  수도 없이 찔렸을 미싱 바늘에 온통 상처 투성이었다.  굳은살도 두껍게 박혀있었다.  마음 한켠이 먹먹했다. 어머니의 고생이 나이테처럼 한 줄 한 줄 손에 새겨져 있었다. 뽀얗고 매끈한  손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손질된 닭발을 들고 한참을 주방에서 뚝딱뚝딱 닭발을 만드시더니 어느덧  한상을 차려주셨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무심하게  던지시며,


왼손에 . 오른손은 술잔 받아야지

이제는 여가생활도 면서 으면 하지만 어머니는 본인이 은퇴하면 대한민국 의류산업 망한다며 우스갯소리로 넘기신다. 쓸데없는 얘기하지 말고 어서 먹자며 재촉하셨다.
왼손에 닭발을 하나 들고 발가락 마디를 앞니로 톡톡 끊은 , 입안에서 돌돌 돌려가며 살을 발라낸다.  발라낸 뼈를 그릇에 뱉을 때마다 처마  풍경소리 마냥 ‘하고 맑은 소리가 난다. 마디를 공략하고 나서는 두툼한 발바닥 살 한입 문다. 꼬들꼬들한 살을 열심히 먹다 보면 눈물이 핑 돌며, 제법 매콤한 맛이 올라온다. 


“아 맵다. 쓰읍!!”


소주를 마실 타이밍이  것이다. 닭발을 먹을 때는 맥주보다 소주가 좋다. 에 소주를 찰랑찰랑 따른 ,
건배를 외치며, 기분 좋게 털어 넣는다.

어머니의 닭발볶음은 시중에 파는 닭발볶음과는 다른 독특한 맛이 있다. 오래 먹어도 물리지 않고, 매콤하지만 맵지 않으며 감칠맛이 돈다. 요리를 제법 한다는 사람들도 어머니가 알려준 레시피를 보고 만들어봤지만 같은 맛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특별한 것은 넣지 않으신다고 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닭발볶음이 맛있는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닭발볶음에  ‘사랑  넣으셨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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