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안톤 Jun 02. 2020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를 읽고

잠시나마 경쟁심을 느꼈던 못난 나를 용서하세요ㅜ

교보문고에서 신간을 둘러보다 흘러 흘러 에세이 분야를 보고 있었다.


주로 서평을 훑어보는 편인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여자축구’를 검색해봤다.

축구 기술 교본, 축구 분석.. 이런 것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봄날 어깨에 내려앉는 벚꽃처럼 가볍게 엔터키를 눌렀다.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에세이였다. 기술 교본도 아니고, 성공한 축구인의 자서전도 아닌.. 에세이가 있다? 여자축구 에세이??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초판은 2018년에 나왔네.

서평을 봤다. 뒤집어지게 웃기고 재미있다고 한다. 축구를 하고 싶어 졌다는 글도 많았다. 작가의 필력에 찬사가 쏟아졌다.


내가 진짜 충격을 받은 것은 축구 에세이가 나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오만함 때문이었다. 저자인 김혼비 작가는 비 선수 출신이다. 얼떨결에 (책에서는 ‘얼결에’라고 표현했다) 여자축구팀에 입단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고 한다.


바로 책을 주문했다. 당장 읽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궁금증이 밀려왔다. 배송된 책을 받아 든 나는 또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도발적인 표지는 또 뭐지?? 밤거리를 거닐다 보면 흔히 보이는 현란한 광고 같았다. 픽셀 하나하나가 ‘하트’ 모양으로 이루어졌다. 심드렁한 기분이 들었다. 왜 비 선수 출신이 축구 에세이를 냈을까. 축구 관계자 거나, 그 비슷한 무언가 일 거라 생각했다. 출판사는 내가 얼마 전 북클럽에 가입한 ‘민음사’였다. 나중에 책을 낸다면 나도 민음사에서 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인데, 입술이 삐죽거렸다.


첫 장을 펼쳤다. 속지는 요즘 책 같지 않은 살짝 클래식한 질감의 종이였다. 고전소설의 펼쳤을 때 그 종이의 질감과 비슷해서 오히려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어디, 얼마나 잘 썼는지 한번 봅시다’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오랜만에 한 호흡으로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감사의 말을 제외하고 273페이지의 책이니 보통의 나라면 두세 번 나눠서 읽을 법도 하다. 그러나 책이 쭉쭉 읽힌다. 오랜만에 경험한 흡입력이다. 얼마 전 읽은 ‘인플루언서’는 문장을 읽을 때마다 겹겹이 쌓인 포장을 벗기는 기분이었다. 집중하면서 읽느라 1/3도 못 읽고 피로함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누군가 알맹이를 쏙 까주면 입만 벌려 받아먹는 기분이다. 한 문장을 여러 번 읽은 것도 있는데 상황, 감정에 대한 표현력이 기가 막혀서였다.


김혼비 작가는 비 선수 출신으로 여자축구팀을 통해 ‘초 개인주의자’라 자부했던 본인의 발전과정에 대해 얘기했다. 생생한 에피소드의 재미와 감동은 말할 것도 없다. 작가의 다른 저서도 살펴보니 대단한 필력을 가진 작가였다. 솔직하고 유머가 넘치며, 글에 생기가 흐른다. 축구에 대한 지식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작가가 축구에 대해 얼마나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억지로 교훈을 주려고 하거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참을 감탄하고 있다가 아이패드에 ‘마인드 노드’를 열었다. 주제에 대한 마인드 맵을 구상할 때 사용하는 앱이다. 전부터 조금씩 축구선수 시절의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다. 언젠가 책을 쓴다면 내 얘기 즉, 축구 얘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잘 쓸 수 있는 나의 이야기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학창 시절 순서로 분리했다. 중학교 1학년부터 대학 졸업까지 3~4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했다.


 

뭔가 ‘응답하라 선수시절’ 같은 느낌이다.


마인드 노드를 정리하며, 일련의 사건을 돌이켜보니 지금의 내 생활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던 선수생활에도 얻을 것이 있었구나.

김혼비 작가와는 또 다른 축구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재미와 감동은 모르겠다. 솔직하게 써볼 생각이다. 나의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은 때로는 괴롭고 속상한 기억을 꺼내야 하는 일이기에 망설여지기도 한다.  


결론은, 오늘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었고,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잘하는 게 서로 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