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바보...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나의 직업은 개발자다.
(프로그래머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고객의 요구사항을 수집하고 일련의 과정(분석-설계-구현-테스트)을 거쳐 전산 시스템으로 구축하는 일을 담당한다.
흔히 집을 짓는 일에 비유하기도 한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브런치 또한 나와 같은 개발자들이 만든 시스템이다. 만약 전산 시스템이 없었다면, ‘좋은 생각’처럼 ‘브런치 생각’이 잡지로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 대리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담당자 : 보내주신 메일 확인했는데 이해가 잘 안돼서 전화드렸습니다. 통화로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나 : 네? 아.. 뭐 설명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어느 부분에서 이해가 안 된단 말씀이죠?
담당자 : 전체적으로 내용이 좀 어려워서요. 이해가 잘 안 되네요. 그냥 말로 요약해주시면 좋을듯해요.
그렇게 10여분 정도 메일의 내용을 ‘말’로 설명했다.
나 : 이제 이해가 되셨나요?
담당자 : 아... 말로 들어도 어렵네요. 제가 메일 내용 다시 천천히 확인하고 연락드릴게요.
나 : (이게 뭐가 어렵다는 거지?)
점심시간에 전화한 똥 매너는 그렇다 쳐도 애써 10여분을 정성스레 설명했는데 다시 메일을 확인하겠다니 고약한 담당자라 생각했다.
내가 보낸 메일은 특정 기능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었다.
워드(ms word) 파일로 저장한 문서를 업로드하여 시스템에 저장한다. 문서의 버전이 변경되면 이전 버전과 한 줄씩 비교한다. 해당 문서가 얼마만큼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어느 부분이 중복되었는지 등을 체크하여 사용자에게 비교표를 제공하는 기능이다. 논문의 표절 검사와 유사한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얼마 전 새로 부임한 담당자가 프로그램을 사용하려고 보니 매뉴얼을 봐도 어렵고 해서 나에게 설명을 부탁한 것이다.
나름 쉽게 썼고, 유선 응대도 그랬다고 생각했다.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가 바보 똥개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문의 사항 답변드립니다.
시스템에 admin으로 로그인을 하고, 화면을 실행하면 상단에 selectBox가 있습니다. 조건을 선택하고 검색하면 문서 history가 Grid에 표시됩니다. 좌측에서 비교할 문서를 선택하고 checkBox를 클릭하면 우측에 file 선택 창이 활성화됩니다. ‘비교’ 버튼을 클릭하면 line 단위로 compare작업이 진행되는데요, progressBar가 100%까지 완료되면 자동으로 비교표가 popup 되고요. 유사 문구가 있거나 중복 line은 bold체로 focus 되니까 확인하시기 편할 거예요. DB에서 data를 select 할 때 index를 참조하도록 Tuning 했기 때문에 속도는 빠를 겁니다. 사용하시다가 exception 발생하면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몇 년 뒤 오래된 메일함을 정리하다가 보낸 메일함에서 저 메일을 발견했을 때,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산용어가 가득하고 (심지어 굳이 영어로 썼다.) 메일 수신자의 눈높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허세와 겉멋이 가득한 쓰레기 같은 메일을 보낸 것이다. 당연히 의사소통은 될 리 없었다. 담당자는 한참 후 같이 근무하던 부장님과 통화를 했다. 질문은 같았지만 대답이 천지차이였다.
전임자가 알려준 사이트 있죠?
그거 클릭해보시면 아이디랑 비밀번호 입력하라고 나옵니다. ㅇㅇㅇ 입력해서 로그인하시고요,
왼쪽 메뉴에서 ‘문서 비교’ 화면을 클릭하세요. 맨 위에 ‘문서 종류’라고 쓰여있는 부분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원하는 문서 종류를 선택할 수 있어요.
네네, 맞아요 그거!! 메롱~하듯이 나오죠? 선택하셨으면 ‘검색’ 버튼을 클릭해보시겠어요?
왼쪽이 원본 문서예요. 체크박스 보이시면 그거 체크해 보세요. ‘파일’이라고 쓴 버튼 색이 바뀌었죠? 눌러보세요~
비교할 문서를 거기서 선택하시는 거예요. 바탕화면에 저장하셨어요? 네네, 그럼 그거 선택해보세요. ‘비교’라고 쓰여있는 버튼 보이세요? 네!! 그거 눌러보세요.
문서 비교가 얼마나 진행되고 있나 보여줄 거예요. 비교가 끝났나요? 창이 하나 새로 떴죠?
거기 보시면 유사 문구에는 노란색으로 밑줄이 있고, 중복이거나 오타는 빨간색 밑줄이 보일 거예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죠?
네네~ 쓰시다가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강렬한 기억이라 그런지 생생하다.
부장님의 수화기 너머로 담당자는 연신 “아이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부장님의 짬밥이란 말인가... 귀로 듣고 있는데도 눈으로 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알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보다 몇 배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축구장은 길이가 최소 100m~110m, 너비는 최소 64m~74m 정도 된다. 일반적인 목소리는 의사전달이 어렵다. 또한 급박한 상황에서 빠르게 의사소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목적이 분명하고 간결해야 한다.
축구경기 또는 연습과정에서 선수들 간 소통은 대부분 2~3글자로 이루어진다. 전후좌우 모든 방향에서 동작이 이루어지다 보니 스스로의 시각에는 한계가 있다. 뒤통수에 눈이 없으므로 주변에 동료들이 ‘말’로 도움을 준다.
어이! : 나에게 패스를 해라
뒤에! : 너의 등 뒤에 수비수가 달려오고 있다 / 너의 뒤에 내가 있다
간다! : 너에게 수비수가 달려간다. 공을 몰고 이동하거나 패스를 하던지 빨리 결정해라
돌아서! : 뒤에 수비수가 없으니 빨리 방향을 전환해서 앞으로 나가라
때려! : 슈팅을 해라. 지금! 당장!
내려와! : 공격이 끝났으니 걸어 다니지 말고 빨리 수비 진영으로 복귀해라
내려와!!!!!!!!! : 역습을 당하고 있다. 수적으로 불리하니 누구든 빨리 와서 수비에 도움을 다오!!
올라가! : 우리 팀이 공격 중이니 어서 가서 도와줘라
올라가!!!!!!!!! : 너 때문에 오프사이드(Off side) 트랩이 무너진다!! 골 먹으면 니가 책임질래!!
나가! : 마크가 없이 상대 공격수가 혼자 공을 몰고 오고 있으니 어서 가서 수비해라
나가!!!!!!!! : 상대가 슈팅을 하려고 한다. 몸으로 막던 얼굴로 막던 나가서 막아라
뛰어! / 출발! : 내가 지금 너에게 붙어있는 수비수 뒤쪽 공간으로 공을 길~게 찰 테니, 넌 똥개 마냥 뛰어서 잡아봐라
따로 숙소에 모여 앉아 칠판에 적어가며 공부를 하진 않았다. 오랜 기간 훈련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짧은 단어만으로도 경기 중 대부분의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말하는 이가 듣는 이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했고, 그에 따른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정보를 전달하거나, 대화를 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듣는 이’의 눈높이다. 나의 눈높이가 아니다. 내가 담당자에게 쓰레기 같은 메일을 보냈던 것은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나의 유식함을 뽐내기 위한 허세에서 비롯됐다. 전산을 알지 못하는 담당자가 selectBox가 무엇인지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부장님은 그러한 눈높이를 고려해 전산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쉽고 정확하게 설명을 하셨다.
관리자가 된 후 그때의 경험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업무만 알고 있는 담당자와 전산만 알고 있는 개발자가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려 노력해야 한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바탕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가끔 무의미한 언쟁으로 녹초가 될 때면 대화를 한 것이 아니라 홀로 독백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직장에서도 축구경기처럼 소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부장님 때려!! (부장님 휴가 올린 거 결재해주세요!!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