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드러내지마라
“훈련시간에 웃는 놈 누구야!”
감독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킥킥대고 웃던 우리는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정색을 했다.
탈모가 심하게 진행 중인 감독님의 정수리는 수도사 마냥 이미 반짝반짝했고, 간신히 붙어있던 옆머리를 길게 길러 뚜껑처럼 덮어 놓았다. 그것이 그 당시 내 눈엔 참 웃기고 궁색하게 보였다. 감독님의 머리 뚜껑(?)은 바람이 조금만 불거나 작은 동작에도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시범을 보이고 계시니 안 쳐다볼 수도 없고, 쳐다보면 웃음이 터지고, 웃으면 화를 내고... 우리도 곤욕스러웠다. 화끈하게 머리를 밀면 될 텐데 악착같이 잡고 있는 저 뚜껑 때문에 매번 욕을 먹는다.
여간 억울한 것이 아니다. 한참 웃음이 많고 장난을 좋아하던 고등학생 시절이지만 훈련시간에는 웃어도 안되고, 울거나 화를 내서도 안된다.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는 것이다.
표정을 진지하게 하면 감정이 절제되고, 그러면 마음가짐 또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감독님의 오랜 지론이다.
운동선수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안 그래도 똑같은 유니폼에 똑같은 헤어스타일을 가진 우리는, 똑같이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웃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란다.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다.
몸에 맞지 않는 옷
회사에서도 나는 늘 굳은 표정이다.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고 나름 유머감각도 있는 편이라 내가 농담을 하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거나, 눈물까지 훔치며 깔깔대곤 한다.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땐 ‘화가 난 것 같다’ 또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무표정으로 있는 것이 가장 편안하다.
애써 웃거나 밝은 표정을 짓는 것은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내가 불편해하니 당연히 상대도 어색할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 나오는 주인공 ‘요조’가 그렇다. 인간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과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고, 어울리며 사는 척을 하기 위해 요조가 선택한 것이 ‘익살’이었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장난으로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늘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도 익살을 멈출 수 없었던 요조는 결국 술과 여자, 약에 빠져 파멸을 맞는다. 나는 요조처럼 불안과 공포에 떨진 않지만 내 감정을 헤아리고 표현함에 몹시 서툴다.
사람의 표정은 35개다
사람의 감정을 얼굴로 표현하는 것이 ‘표정’이다. 이 표정은 대략 35가지 정도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얼굴 근육의 이완과 수축, 눈썹과 입꼬리의 움직임, 눈의 주름 변화를 통해 표정을 구분한다고 한다.
행복, 슬픔, 분노, 혐오, 두려움, 환호, 공포 등이 그렇다. 그러나 감정은 무려 1만 6384개라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고작 35가지 표정으로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몇 개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책상 앞 모니터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얼굴에 힘을 빼고 편안한 상태로 있음에도 모니터에 비친 나는 살짝 화가 난 듯 보인다.
얼굴 근육을 움직여 광대와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웃음’이다.
그러나 비웃고 있는 내 얼굴에 조금 당황했다. 손으로 얼굴을 비벼 긴장을 풀었다.
‘그래, 얼굴이 굳어서 그렇겠지’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을 떠 올리며 눈과 입꼬리를 올렸다.
‘행복’을 표현한 것이다. 아까보다 더 확실히 비웃고 있다.
경락을 받아야겠다.
표정에 마음을 더해
얼굴에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표정에는 감정이 투영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나는 십 수년간 감정을 통제하며 살았다.
지금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나의 표정은 늘 굳어있고, 미소는 어색하다. 그래서 나는 말투와 행동을 더해 나를 표현한다.
출근 후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건네는 다정한 인사, 힘들어하는 직원에게 건네는 위로, 다 먹은 생수통을 번쩍 들어 갈아주고, 화장실 세면대에 튄 물기를 닦는 것 등으로 나의 마음을 드러낸다.
코로나로 마스크까지 쓰고 있으니 보이는 것이라곤 눈과 눈썹 뿐이다.
상대에게 나의 얼굴표정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감정을 표현하는것이 더욱 힘들어졌다는 의미다.
얼굴 표정에서 보이는 것 너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까.
35가지밖에 안 되는 표정만으로는 1만 개가 넘는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기가 턱없이 부족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