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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안톤 Aug 23. 2020

처서(處暑), 가을의 문을 열다

늦여름의 끝에서 본 가을 단상

밤새 천둥번개가 번쩍번쩍하고, 비바람이 매섭게 쏟아붓더니 오늘은 다행히 쾌청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동동 떠있는 하얀 구름이 예뻐 한참을 바라봤다.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꼽으라 하면 단연 파란색과 흰색의 조합이 아닐까 생각했다.



가을이 올 것 같다

베개 커버와 침대 시트를 갈아 끼웠다.

날이 선선해지면 기분전환할 겸 사두었던 것인데 오늘이 그날 인가보다. 창문을 활짝 열고 신선한 바람을 맞이한다. 도심 속 오피스텔이 아닌 공기 좋은 시골이었다면 좀 더 상쾌함을 느꼈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베개와 침대 시트와 집안의 공기가 모두 새것으로 바뀐듯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옷장 속 여름옷도 정리했다. 서랍 깊은 곳에 잠자던 가을 옷을 꺼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뜨겁게 여름을 보낸 옷들을 쉬게 했다. 은은한 향의 방향제와 제습제도 함께 넣어두었다. 고생한 옷들에 대한 고마움이고 잘 쉬다가 내년에 또 만나자는 약속의 징표다.

고된 여름살이

올여름은 유독 힘들었다. 비단 무더위와 장마 때문만은 아니다.

푹푹 찌는 날씨에도 답답한 마스크를 끼고 다녀야 했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한겨울에도 장갑이 필요 없는 나는 손수건으로 연신 마스크 속 얼굴의 땀을 닦았다. 마스크에 땀이 번져 눅눅해지면 새 것으로 갈아야 되니 여분의 마스크도 여러 장 챙겨 다녔다. 그리고 코로나의 여파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도 차질이 생겼으며, 회사에서는 신규로 진행하려던 사업들이 줄줄이 보류되거나 취소되었다. 게다가 여름만 되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무좀’과 ‘벌레’도 한몫을 했다. 축구선수 시절 땀에 젖은 스타킹과 통풍이 전혀 되지 않는 축구화는 나에게 훈장과도 같은 무좀을 안겨주었다. 운동을 그만둔 지 한참이 되었지만 여름만 되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녀석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발가락마다 귀여운 동물이 그려진 ‘발가락 양말’은 필수다.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주변에도 나처럼 저마다의 설렘과 기대를 안고 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낚시를 좋아하는 지인은 가을철에 손맛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쭈꾸미 낚시에 벌써부터 채비를 손질하고 틈틈이 새로운 낚시 장비를 구경하고 있다. 지방에서 상경한 친구는 코로나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가족들을 추석에 만날 생각에 열심히 부모님 선물을 고르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자취하는 입장이니 오랜만에 먹는 집밥의 행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상상만 해도 얼마나 행복할지 충분히 공감이 된다. 또 등산을 좋아하는 지인은 오색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 산행을 기다리고 있다. 계절마다 보기 좋지 않은 산은 없지만 가을산은 ‘절경’이라 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선선한 날씨 덕에 등산하기에도 더없이 좋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가을은 늦지 말고 제대로 와 주어야 한다. 오늘은 24절기 중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처서(處暑)다. 가을의 문이 열렸다. 이제 하루가 다르게 아침저녁의 온도와 공기의 냄새가 달라질 것이다.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질 것이고, 밤나무의 밤송이도, 감나무의 감도 저마다 제 색깔을 찾아갈 것이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고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의 고약한 향이 길가에 가득 퍼질 때쯤 가을은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지난겨울과 봄을 지나 여름까지 무사히 잘 견뎠다. 삶도 일도 쉽지 않지만 잘 견디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힘들었던 시간을 뒤로하고 새로운 희망을 다가올 계절에 기대하기 때문이다. 무더운 여름을 견디며 시원한 가을이 오길 기다리고, 다시 하얀 첫눈이 내리는 겨울을 기다린다. 추위에 몸과 마음이 움츠려들 때쯤, 벚꽃이 흩날리는 따스한 봄의 햇살을 꿈꾼다.  (우리나라의 사계절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삶도 계절과 같다

계절이 변하듯, 힘든 시절도 행복한 순간도 왔다가 사라지고  또  찾아오길 반복한다.

지난겨울이 추웠다는 것만 기억할 뿐, 얼마나 추웠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또 지난여름이 더웠지만 얼마나 더웠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 나의 기억을 적당히 보정을 해주고 무뎌지게 해 준 덕이겠다. 그러니 매 순간 찾아오는 불행과 행복도 계절과 같은 것이다. 오고 가고 맞이하고 버티면 반드시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굳은살처럼 단단한 내가 남을 뿐이다.  


부디 가을의 왕성하고 청명한 기운으로 모두를 힘들게 하는 코로나와 더위가 물러가길 여름의 끝자락에 서서 기대해본다. (나를 힘들게 하는 무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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