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호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시절, 4세 반 수료 선물로 앨범을 받았다. 그동안의 활동사진을 담은 집 모양의 사랑스러운 선물이었다. 부피가 좀 커서 치워두었었는데 얼마 전 찾아야 할 게 있어서 잠시 내려놓았다. 2호가 그걸 보더니 자기 사진이라 신기했는지 한참을 들여다보고, 들고 다니면서 놀았다. 잘 치워만 두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바닥에 사진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걸 보았다.
사진을 이렇게 바닥에 굴러다니게 두면 어떡해?
정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걸 지적하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하면서 사진을 집어 드는데 4세 시절의 내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 너무 귀엽다!
가만히 나를 지켜보던 신랑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했다. 시작은 짜증이었는데 마무리는 감탄이 되어 나와버린 것이다. 신랑과 둘이 웃음이 터졌다.
미운 7살이었는데 요즘은 미운 4살이 되었다고 했다. 아이가 4살 즈음에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 고집만 늘어서 큰 애를 키울 때와 다르게 벅차다는 생각에 매일 육아가 힘들게만 느껴졌다. 육아서를 붙들고 살면서도 도무지 내 아이는 왜 안 되는 건지 내가 문제인 건지 날마다 자괴감을 느끼고 반성하느라 바빴다. 그랬는데 지금 그때 사진을 보니, 내 아이의 빛나고 예쁜 시절에 힘들어하느라 예쁜 건 하나도 모르고 지나갔다는 생각에 막연한 기분이 들었다.
큰 애는 손이 많이 가는 아이가 아니었다. 비록 잘 안 먹고, 잠을 잘 안 자는 아이였지만 말을 하면 듣는 아이였고, 크게 고집을 부리는 편도 아니었다. 설득이 되는 아이였던 것이다. 잠투정도 없어서 자다 깨서 울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쩌다 아이가 울 때면 귀여워서 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그랬는데 지금 큰 아이가 울면, 나는 징징대지 말라고 말한다. 제발 적당히 하자고 말하고 아이의 말을 들어주거나 그 감정에 공감해주지 못하는 엄마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의 예쁜 부분을 놓치고 있다.
둘째는 애교가 많고 많이 치대는 편이다. 텔레비전을 볼 때도 가만히 앉아서 보기보다 나한테 매달리거나 어떻게든 기대는 날이 많다. 그럴 때면 몸이 힘들다 보니 '저리 가, 그만해' 하는 말을 수시로 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가 나에게 치대는 것도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나중엔 내 옆에 오지도 않고, 굳이 나한테 말을 붙이지도 않을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걸 알기에 그런 말을 하지 말자고 수십 번 다짐을 해도 '저리 가'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온다.
아이의 투정을 들어주고 감정에 공감해 주는 일도, 아이가 나에게 매달리는 걸 받아주는 것도 지금 한 때의 순간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왜 나는 그걸 못하고 있을까. 고민 끝에 나온 답은 바로 '체력'이다. 내가 체력이 떨어져서 아이를 든든하게 받아줄 수 없는 거라는 거였다. 아이의 짜증이 터지는 순간도 아이가 나에게 매달리고 기대는 순간도 역시 아이의 체력이 떨어질 때 찾아온다. 보통 그즈음엔 나도 체력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지나고 보니 그때가 예뻤구나, 모르고 지났구나 하는 순간이 지금 이 순간이 될 수 있다. 그 소중한 지금을 지키기 위해, 나는 체력을 기르기로 한다. 많이 걷고, 건강하게 먹고, 내 몸에 관심을 더 주어야겠다. 그래서 더 오래 아이를 안아줄 수 있는 엄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