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평화로운 1호선
로그라인: 오늘도 평화로운 1호선 지하철, 단소 할아버지가 난동을 피우다 '나'에게 단소를 빼앗긴다. 할아버지는 그의 소중한 단소를 되찾고자 한다.
캐릭터
단소 할아버지: 72세. 남.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 연이 끊긴 이후 20년째 노량진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다. 별다른 직업 없이 기초생활연금으로 생활하는 그의 하루 일과는 1호선을 휘저으며 사람들을 단소로 위협하는 것. 지하철 민원 신고로 경찰서도 몇 번 드나들었지만, 누구도 그를 멈출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천적을 만났다. 머리에 피도 안마른 어린 놈이 그의 소중한 단소를 빼앗아버린 것! 그는 단소를 되찾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의 머리를 두들겨 패줄 수 있을까?
'나': 22세. 남. 대학생. 서울에 상경한 지 3년째. 하지만 1호선 지하철에는 도저히 적응이 안된다. 여긴 왜 이렇게 선량한 시민들을 괴롭히는 '빌런'이 많을까?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젊은 피 'MZ' 답게, 그는 더 이상 이들의 횡포를 눈감아주지 않기로 한다. 뜬금없이 나타나 사람들을 위협하는 노인에게 단소를 빼앗고 다시는 허튼 짓을 할 수 없게 '참교육'을 시키려는데... 어라? 단소가 없으니 이 빌런, 그냥 마르고 힘없는 할배일 뿐이다. 거기에 자신의 슬픈 사연까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한없이 가여워보이는 이 할배에게 '나'는 단소를 돌려줄 수 있을까?
"또 시작이다."
옆 사람의 한숨 섞인 혼잣말에 나는 꾸벅거리던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 지하철 옆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내 누군지 아나! 내 이승마이하고 호형호제했던 사람이다!"
이승만이 형인지 동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두 경우 다 지금까지 살아있을 순 없는데. 나는 의문과 짜증, 그리고 묘한 호기심에 그 호기로운 외침의 정체를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 후, 드디어 오늘의 빌런이 등장했다. 광기 어린 눈, 듬성듬성한 흰 머리, 성마르고 작은 팔, 그리고 그 팔로 치켜든 위풍당당한 단소! 그랬다.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이후 가장 센세이셔널한 이 등장의 주인공은 바로 '1호선 단소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SNS에서 짤로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실물은 초면인 탓에 나는 내적 친밀감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꼈다. 단소 할아버지는 '1호선 네임드'답게 열차 칸에 들어서자마자 익숙한 몸짓으로 다음 먹잇감을 탐색했다. 노인 우대석에 앉은 할머니 둘, 할아버지 하나, 그리고 그 옆 자리의 아저씨와 남고딩을 거쳐 그의 눈이 빛난 곳은 바로 핸드폰에 코를 박고 있는 20대 여자였다. 그는 지체없이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의 첫번째 쇼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어린 노무 쉐끼가 으디 어른이 왔는데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노? 버르장머리 없구로! 정신 교육 함 해줘야 칸다."
그는 작은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우렁찬 발성으로 지하철을 깨웠다. 난데없는 불호령을 맞은 여자는 자기에게 하는 말이냐는 듯 당황한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할아버지는 그의 소중한 장미칼, 단소를 치켜들고 있는 힘껏 여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꺄악!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이래도 정신이 안드나! 이래도! 이래도!!"
할아버지는 구간에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이래도'를 반복하며 여자의 머리를 단소로 가격했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날아오는 단소를 피하려 했지만,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벗어날 순 없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난장판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나도 그 방관자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불의에 순응하는 소시민으로 살기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가족상을 당해 연락이 두절된 팀플 사람들 때문에 홀로 밤을 지새야 했던 어제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고 보증금 사기를 치려 들었던 집주인에게 한 마디도 못했던 그제처럼 살지 않을 거란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단소 할아버지에게 다가가는 두 발을 느꼈다. 내 손이 할아버지의 마른 팔을 잡아채고 단소를 빼앗았을 때, 나는 내가 이렇게 멋진 놈이었던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뭐하는기고? 내놔라 이놈아!"
할아버지는 갑작스러운 공격이 당황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단소를 내놓으라는 말만 중얼거렸다. 하지만 단소 없는 단소 할아버지는 앙꼬 없는 찐빵, 아니 찐빵 없는 찐빵, 그러니까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 소중한 무기를 빼앗긴 할아버지의 어깨가 유난히 왜소해보였다. 이 할아버지, 그냥 늙고 외롭고 지친, 노인네일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자기객관화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선처를 호소하기 시작했다. 죄를 경감시킬 수 있는 슬픈 개인사가 펼쳐졌다. 그의 삶은 꽤나, 아니 많이 기구했다. 평생을 건설 노동자로 살다 한쪽 다리가 다쳐 일을 못하게 되자 결국 아내에게 이혼 당했다는 이야기. 자식들은 스무 살이 되자마자 집을 나가 연락이 끊겨버렸다는 이야기. 결국 일도 못하고 20년째 고시원 쪽방에서 기초수급자연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야기. 말을 건넬 사람도, 건네줄 사람도 없어 매번 지하철에 와 사람들과 만난다는 이야기. 자신의 방식이 과격하긴 해도, 결국 세상과 소통하는 거라는, 그래서 단소는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유유일한 물건이라는 이야기.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솔직히 나는 많이 당황했다. 이 볼품없는 낡은 단소가 그렇게까지 대단하고 소중한 물건이었다니. 이 작고 불쌍한 할아버지에게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니. 세상은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구나. 이 부조리를 이해하는 게 어른이 되는 일이구나. 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에 다시 단소를 돌려주었다.
"할아버지. 그래도 죄없는 시민들을 괴롭히진 마세요. 단소는 내려치라고 만든 게 아니라, 불라고 만든 거랍니다. 아셨죠?"
단소를 되찾은 할아버지는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짓는다. 이어 연신 '고맙다', '알았다', '미안하다'를 반복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도망친다.
옆 칸으로 사라진 단소 빌런을 보며 나는 오늘 조금 더 어른이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느낀다. 잠적한 팀원도, 못된 집주인도 다 자기만의 사정이 있겠지. 그걸 이해하는 게 진짜 어른이겠지. 아련한 미소를 머금고, 지하철 밖 노을을 보며 나는 상념에 젖는다. 그때, 옆 칸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린 노무 쉐끼가! 버르장머리 없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