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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Mar 21. 2022

바람 불고 흐린 날엔 뜨끈한 국물이 최고지!

속마음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어요.

아무래도 겨울은 흔쾌히 봄에게 계절의 자리를 내어줄 마음이 없나 보다. 살랑 부는 봄바람에 멋을 부린 옷차림이 영 거슬렸는지 보란 듯이 매서운 바람을 몰고 왔다. 주말 아침 독서실 간다고 나갔던 남편이 금방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와 구석으로 밀려났던 겨울 점퍼를 다시 꺼내 입었다. 창 밖을 보니 아파트 조경수로 심긴 야자수 세 그루의 잎사귀들이 긴 머리카락 휘날리듯 옆으로 누워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늘도 심기가 불편한지 잔뜩 찌푸린 채 해님까지 가려버렸다.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겠네.'


주말인데 집에 머무르는 게 잘못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아이에게 그렇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더 많이 보게 해 주고 더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인 것 같아 맑은 날 집에 있을 때면 슬며시 아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마음 편히 날씨를 핑계 삼아 이불속으로 깊숙이 몸을 담았다. 이불이 주는 포근함과 아늑함이 좋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불속에서 뒹굴거려본 게 언제였더라 하고 생각하며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당기려는 순간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엄마! 배고파!

- 그러니까 아빠 먹을 때 같이 먹었어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가 나에게 허락될 리가 없었다.


남편은 나를 깨우지 않고 알아서 찌개를 데우고 미니돈까스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서 아침을 먹었다. 아이에게 함께 먹자고 권하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조금 이따가 먹는다고 하더니 남편이 나가자마자 밥을 내놓으란다. 게으른 엄마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말 한마디는 아마도 '배고프다'는 아이의 말일 것이다. 이불을 걷어내고 주방으로 나와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떡갈비 몇 개를 구워 아이 밥 한 끼를 챙겼다. 싱크대에 담긴 그릇들을 살피니 식기세척기를 돌리기엔 양이 적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무념무상으로 설거지에 집중하다 보니 손 끝에서 느껴지는 뽀득뽀득한 느낌과 수전을 통해 흘러나오는 물소리가 ASMR이 되어 귓가에서부터 온몸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게 했다. 최대한 천천히 몇 개 되지 않는 그릇들을 씻은 후에는 캡슐 커피를 내리고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카페라테 한 잔을 만들어 소파로 갔다. 느릿느릿. 나의 모습이 흡사 나무늘보 같았다.


우리네 삶은 종종 발을 동동 구르며 빨리빨리 움직여야만 할 때가 많다. 출근길에, 회사에서, 때때로 집에서조차 분주하다. 가끔씩은 느리게 가는 시계에 몸을 맡긴 듯 긴장을 걷어내고 느릿느릿 살아보면 어떨까? 나는 오늘로 정했다. 유튜브 동영상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책 보다도 소파에 누워 이런저런 영상들을 찾아보며 오후를 보내기로 했다. 예능부터 좋아하는 드라마 다시 보기를 하며 웃었다 울었다 하는 사이 아이는 방에서 키즈 크리에이터들의 영상을 보며 까르르까르르 웃다가 '좋아요와 구독 눌러주세요!' 하고 멘트를 따라 하기도 했다. 책을 보거나 글을 쓰고,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로 상호작용을 해주며 아니면 집안일이라도 말끔히 해야 주말을 알차게 보내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게으른 주말도 나쁘지 않았다.


<개미와 베짱이> 동화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읽는다. 개미는 쉬지 않고 일을 하는데 베짱이는 풍류를 즐기다가 겨울이 찾아왔을 때 먹을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동화에서 얻었던 교훈은 아마도 개미처럼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 자였던 것 같다. 비슷한 교훈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속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알게 모르게 부지런함은 긍정적인 개념으로 게으름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인식하며 자란 탓인지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불안감도 찾아오곤 했다. 학교에 빠지는 일이 없었고, 아르바이트를 쉬어본 적이 없고, 학원 강사를 하면서 학원을 옮길 때에도 공백이 없었다. 아프면 학교도 좀 쉴 수 있고, 아르바이트로 돈 좀 모았으면 여행도 가고, 직장을 옮길 때에는 바로 다음 학원으로 출근할 게 아니라 시간을 두고 미래를 그려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쉼표 없이 계속 잰걸음으로 마흔까지 달려왔다.


저녁이 되었고 오늘의 휴식에 자발적 마침표를 찍기로 했다. 쌀을 씻으며 받아 둔 쌀뜨물로 김치찌개를 끓였다. 배달 반찬의 효율성과 편안함에 익숙해져 무얼 만들어 먹지 않은지가 꽤 되었었는데 바깥 풍경의 스산함 때문인지 남편에게 따뜻한 국물 한 술 뜨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떡볶이 사갈까?' 하고 저녁 밥상을 기대하지 않은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답장으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김치찌개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밥 먹으러 와.' 남편은 한 달음에 달려와서는 밥 한 공기를 뚝딱 먹었다. 국물을 한 수저 뜰 때마다 "크! 좋~~ 다!" "캬! 시원하다!"를 연발했다.

- 바람 불고 흐린 날엔 뜨끈한 국물이 최고지!


저녁 시간까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저녁밥을 하는 대신 조금 눈을 부쳤다면 남편이 사 온 떡볶이를 먹었을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쉬는 것조차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내 몸을 혹사시키는 건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앉아 쉴 시간이 없다고, 남들만큼 먹고살려면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궁지에 몰아넣기 일쑤이니 말이다.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매주 놀이 체험을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부족하게 키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도 어린이집이며 유치원에서 사회생활하느라 힘이 든다. 아이를 끌고 밖으로 도는 건 어쩌면 부모의 욕심일지도 모른다. 아이를 넘치게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것이 아이의 정서 발달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매일 쉴 새 없이 피곤한 일상에서 하루쯤은 편히 몸을 누이고 늘어지게 낮잠 한 숨 자고, 자기 계발서 대신 웃고 즐길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 눈과 귀를 맡기며 시간을 흘러가게 두는 것도 우리 일상에서는 소중하다. 남편이 소파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이유를 오늘에서야 조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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