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살림을 즐겨하지 않는, 무늬만 주부인 나지만 주방에서 가장 애정 하는 용품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뚝배기를 꼽을 테다. 알록달록 예쁘지도 않고 날렵, 세련되지도 않은 이 투박한 그릇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엄마의 영향이 크다. 엄마는 알아주는 손맛 장인으로 음식에 대한 자신만의 소신이 강하신 분이다. 그중 하나는 '뜨거운 음식은 뜨겁게 먹어야 제맛'이라는 거다. 겨울이건 여름이건 계절은 중요하지 않다. 담기는 음식의 종류를 가리지도 않는다. 된장찌개를 기본으로 곰국, 소고기김치볶음밥, 라면까지 먹는 동안 온기를 유지해야 더 맛있는 음식이라면 뚝배기에 담길 자격을 얻는다. 덕분에 뚝배기는 하루도 상에 오르지 않는 날이 없었고 어느 때에는 두 개, 세 개가 한 상에 오르는 날도 있었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뚝배기는 상으로 옮겨진 뒤에도 한참 동안 지글지글 열기를 뿜어댔다. 음식을 숟가락으로 한 술 크게 뜬 다음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호호' 불다가 '호로록' 입 안으로 밀어 넣기만 하면 허기진 배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허전한 마음까지 가득 차오르곤 했다.
우리 집에는 모양과 크기가 다른 뚝배기가 3개 있다. 할 줄 아는 반찬이 된장찌개, 김치찌개 같은 일품요리이다 보니 뚝배기 활용도가 높은 편이다. 식구가 세 명뿐이라 가장 큰 뚝배기는 사용할 일이 많지 않고 소, 중 사이즈는 어릴 적 엄마가 차려준 밥상에서 그랬듯 내가 차리는 식탁에 단골손님이다. 아이는 뚝배기에 끓여주는 우동(가락국수라고 써야 맞겠지만 우동이 왠지 더 뜨끈한 기분인 탓에 우동이라 쓴다)을 좋아한다. 그릇에 덜어 식혀먹긴 하지만 출발은 언제나 뚝배기이다. 그런데 이 뚝배기가 아주 요물이다. 알아주는 똥손인 덕에 음식 솜씨가 영 늘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뚝배기에 휘뚜루마뚜루 요리를 하고 나면 보이는 것도 먹음직스러울 뿐 만 아니라 맛도 더 깊은 맛이 나는 기분이 든다. 처음 뚝배기가 데워지기까지는 냄비보다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일단 한번 뜨거워지고 난 후에는 웬만해서는 식을 줄을 모른다. 또한 뭉근하게 오래 끓일수록 국물에 맛이 든다.
좋아하는 배우 중에 이정은 배우님이 계시다. 영화 '기생충'으로 제40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은 후 수상 소감이 너무 인상 깊어 메모해 두었는데 읽을수록 배우님의 시간과 뚝배기의 시간이 퍽 닮았다.
요즘 제일 많이 듣는 말이 너무 늦게 저한테 이런 스포트라이트가 비친 것 같다고 말씀을 하시는데 저 스스로는 이만한 얼굴이나 이만한 몸매가 될 때까지 그 시간이 분명히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정은 배우는 하루아침에 떠오른 '반짝 스타'가 아니다. 나는 이 배우를 2015년 TVN 드라마 <오 나의 귀신님>에서 마음 여린 무당 '서빙고' 역을 맡았을 때 처음 보았는데 그 후로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에서, <쌈, 마이 웨이>에서, <미스터 선샤인>에서 <눈이 부시게>에서, 가장 최근에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도 보았다. 또 내가 보았던 혹은 보지 못했던 숱한 연극 무대에서, 영화 필름 속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기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잔뼈가 통뼈로 굵어질 때까지 배우로서 그녀는 뜨거운 시간을 견디고 있었으리라. 한번 끓는점에 도달한 이후로는 식는 방법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열정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으니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그녀의 온기로운 연기가 좋다.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의 그림자에는 그녀의 시간이 함께 드리워져있다.
나는 단숨에 끓어오르는 사람은 아니다. 내가 나이기 위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기 전 10년. 힘들었던 기억으로 점철된 20대라서 지워버리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돈이 간절했던 시기에 그만큼 벌 수 있어 감사했을 뿐만 아니라 야생의 경쟁 사회를 미리 경험함으로써 공직 생활에서도 버틸 수 있는 연료를 저장해 둔 셈이다. 두 번째는 글을 쓰기까지의 모든 시간.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40년이 걸렸다. 그런데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보고, 배우고 느낀 모든 감정들이 앞으로의 글 안에 담기기 위해 이 정도의 시간이 분명히 필요했다고 믿는다. 일이든 글이든 이제 뭉근히 끓어오르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무겁고 투박해서 사람들 손에 잘 닿지 않는 뚝배기, 데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결국은 끓어오르는 뚝배기, 여간해서는 식을 줄 모르는 뜨거움을 간직한 뚝배기, 아무거나 담겨도 멋스럽고 맛스러운 뚝배기. 뚝배기라는 단어가 들어간 자리에 사람이라는 단어를 넣었더니 닮고 싶은 삶의 모습이 된다. 뚝배기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