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양말을 손빨래하게 될 줄이야!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식기세척기 등 가전 이모님들은 오늘도 맡은 바 열일 중이시다. 가전 이모님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책 읽을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모자라 매일 동동 거리며 시간을 쪼개 써야 했을 것이다. 가전 이모님들께 감사한 마음이야 언제나 진심이지만 세탁기 이모님께서도 해결해 주시지 못하는 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아이의 옷과 양말이다.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키즈 명품은 아니더라도 나름 비싼 유아동 브랜드 옷들을 입혔다. 어린이집에서 보내주는 활동 사진에 예쁘게 옷 입은 아이를 보면 혼자 뿌듯했다. 고슴도치가 따로 없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세 돌까지는 좋은 옷을 입히면 입히는 테가 났다. 아이의 옷은 전적으로 엄마의 센스라고 자부했다.(제가 그때는 뭘 몰랐어서 경솔했어요.) 입었던 옷 중에 새것과 같은 상태의 옷들은 17개월 차이 나는 사촌동생에게 보내곤 했으므로 옷을 사 입히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면서 활동양이 많아지다 보니 한 계절만 입힌 옷이라고 해도 낡고 해어져 누구에게라도 물려주기 어렵게 되었다.
아이 옷은 원단도 덜 들어갈 텐데 가격은 왜 이렇게 비싼지 모르겠다. 상하복 한 벌을 사자고 하면 기본 5-6만 원, 디자인이나 색감이 좀 더 들어간 것은 8-10만 원에 육박한다. 한 철 입을 옷이 이렇게 비쌀 필요가 있는가 하는 뒤늦은 자각이 찾아왔다. 마침 집 앞에 중저가 키즈 브랜드 매장이 있어 둘러보았는데 29,000원, 39,000원에 1+1인 옷들이 즐비했다. 브랜드를 대표하는 캐릭터나 앰블럼은 따로 없었지만 5-6세 남자아이가 무난하게 입을 상하복은 많았다. 나쁘지 않은데? 아니, 오히려 좋은데?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옷이 멀쩡한 날이 하루도 없다. 어떤 날에는 선생님께서 먼저 전화를 주시기도 한다. 주로 놀이하다가 옷이 너무 더러워져 버려서 유치원에 있는 여벌 옷으로 갈아입혔다거나 넘어지면서 바지에 구멍이 났다거나 하는 내용이다. 다친 데만 없으면 옷이야 더러워지든 찢어지든 괜찮다고 말씀드리는데 200% 진심이다. 아이의 옷에서 아이의 하루를 느낄 수 있다. 옷이 깨끗하다 싶은 날엔 미세먼지나 비가 오는 날씨 탓에 바깥놀이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날엔 하원하면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도 시시하다. 반면 아이 몰골이 꼬질꼬질하고 옷이며 신발이며 흙모래 범벅일 때에는 엄마, 엄마 있잖아 오늘! 하며 신나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아이의 옷이 더러워지면 더러워질수록 아이의 웃음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세탁기 이모님의 기능이 약해진 걸까? 아이의 옷과 양말의 얼룩들이 채 빠지지 않는 일이 생겨났다. 다음에는 오염된 부분에 표백제를 미리 뿌려놓고 불림 기능을 이용해 보았다. 이전보다 조금 때가 빠진 듯 보이긴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특히 양말이 문제였다. 신발 없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나 싶을 정도였다. 양말이 일회용도 아닌데 한번 신고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탁기 이모님은 여전히 자기 몫은 해주고 계시니 이제는 내가 나설 차례였다. 바로 손으로 비벼 빨기. 과탄산소다를 따뜻한 물에 풀어 양말들을 담가 때를 불린 뒤 한 켤레씩 집어 들어 빨랫비누로 신나게 문지르고 나서 두 손으로 야무지게 싹싹 비비면 발가락마다 묻어있던 까만 때들이 점점 하얀 비누거품과 함께 사라진다. 옷도 마찬가지이다. 손으로 조물조물하고 얼룩이 심한 곳은 집중 공략 후 미리 빨아둔 양말들과 함께 세탁기에 넣고 마무리 세탁을 하면 빨래 끝.
남편이나 내 옷을 손빨래하는 경우는 없다. 때가 좀 덜 빠진 양말이라도 세탁한 데 의의를 두면 그뿐, 손빨래를 해야 하는 경우는 좋은 옷의 옷감 손상을 막기 위해서이고 이런 경우는 대부분 세탁소에 맡긴다. 운동화도 요즘은 세탁소에 맡기면 깨끗하게 신을 수 있다. 세탁뿐인가? 식기세척기가 설거지를 대신해주고,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대신해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엄마가 나를 키울 때를 생각하면, 그 이전에 할머니 또 그 이전의 할머니들을 생각하면 살림하기가 편해졌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럼에도 집안일은 여전히 하기 싫고 귀찮은 일 중에 하나이지만 아이 옷과 양말은 손빨래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엄마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아이 옷은, 양말은, 깨끗하게 해서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엄마의 마음이라면 나도 이제 제법 '엄마'가 되어가는 모양이다.
제주에 눈이 많이 와서 유치원에 보내지 않았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유치원 방학인데 하루 당겨진 셈 치기로 했다. 눈구경을 가자는 아이에게 창문 너머 눈보라 치는 날씨를 보여줬지만 금세 시무룩한 표정이 되고 만다. 추우면 자기가 먼저 집에 가자고 할 테지, 남편이 아이 옷을 챙겨 입혔다. 털바지에 털잠바, 털운동화, 화, 목도리, 장갑까지 중무장을 하고는 아빠랑 신이 나서 나갔다. 얼마 후 남편이 동영상을 보내왔는데 어라? 장갑이 안 보인다. '애기 장갑 어딨어? 손 빨갛잖아!' 하고 당장에 전화를 했더니 '불편하다고 안 끼겠대.' 한다. 손은 얼어서 새빨간대도 눈을 뚫고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의 표정은 해맑기만 하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지 뭐.
아들을 키우려는 자, 손빨래에 이어 걱정의 무게를 감당할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