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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콤달달 Oct 18. 2022

사교육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이의 첫 학원

아이가 서너 살 때만 해도 어린이집 하원 후에 함께 할 놀이가 제법 많았다. 말을 깨우쳐주기 위해 공룡 피겨를 들고 공룡 흉내를 내고, 장난감 중장비를 종류별로 꺼내어 부릉부릉 자동차 놀이를 하고, 어느 날엔 환자가 되어 바닥에 드러누워 청진기를 귀에 꽂은 꽂은 꼬마 의사의 진료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여섯 살인 아이는 우리 부부보다 더 논리적으로 말을 할 줄 알고 자동차 종류도 훤히 꿴다. 병원 놀이나 로봇 장난은 시시해져 버린 지 오래이다. 유치원에서 하원하고 집에 오면 오후 5시. 밤 9-10시 잠들기 전까지 아이의 시간을 어떻게 채워주면 좋을까?


아이가 가장 선호하는 활동은 유튜브 시청이다.(대신 스마트폰이 아니라 텔레비전으로 보게 한다.)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이 오락거리는 어쩌면 부모의 죄책감과 편안함 사이 타협의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주기만 하면 휴대폰 서핑을 할 시간도, 책을 읽을 시간도, 세탁기를 돌리고 밥을 차릴 시간이 생긴다. 아이 스스로 레고 블록 놀이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한글을 끄적일 때도 있지만 오랜 시간 지속하기는 어렵다. 아이가 유튜브 보는 시간이 길어질 때 꺼내 드는 카드는 산책이다. 물론 산책의 즐거움이 유튜브의 자극을 이길 리는 만무하므로 거부하기 힘든 유혹의 징검다리를 하나 놓아둔다. 산책길 끝에 문방구에 들르는 일. 무인점포라서 구경만 하고 나와도 눈치 보이지 않고 천 원 정도의 유희 거리들이 포진되어 있어 텔레비전으로부터 아이를 떼어내기에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산책 말고 다른 좋은 대안은 뭐가 있을까?


평소와 다름없는 평범한 일상이 묘하게 다르게 느껴진 어느 날이었다. 하원하고 돌아온 아이의 가방 안에는 여느 때처럼 아이가 유치원에서 그린 그림들이 들어있었다. 하나같이 졸라맨 아니면 어몽어스 캐릭터뿐이었다. "우와, 멋지다! 색을 다양하게 활용했네!" 하고 칭찬을 하면서도 문득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작년에 그렸던 그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섯 살이면 한글을 다 깨친 아이들도 많은데 한글은커녕 그림도 이 수준이라니, '놀이'에 치우쳐 '교육'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미술학원이지요? 여섯 살 남자아이 체험 수업 문의 좀 드리려고요. 학원은 처음이에요.

눈여겨보던 미술학원에 전화를 해서 일정을 잡았다. 학원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 데 있어 사실 그림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졸라맨이든 어몽어스 캐릭터이든 아이가 그림을 그리며 즐거움을 느꼈으면 충분하고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부모-아이가 상호작용하며 할 수 있는 놀이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아이가 텔레비전 보는 시간이 점점 길어져 가는 상황이 내심 불편하던 차에 그림 한 장이 불씨가 되었을 뿐이다.

- 엄마, 나 학원은 가기 싫은데...

통화를 듣고 있던 아이는 예상대로 학원은 가지 않겠다고 했다.


아이도 학원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유치원에서 집이 아니라 노란 버스를 타고 학원으로 하원하는 친구들도 많으니 유아 세계에서도 학원은 대화 주제로 자주 등장하는 모양이었다.

- 엄마, ㅁㅁ이는 학원을 세 개나 다닌대. 미술, 태권도, 수영.

- 엄마, ㅇㅇ는 아소비에 간대.

학원을 다니지 않는 아이를 손에 꼽는 게 빠를 것 같았다. 맞벌이 부모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아이를 학원으로 돌리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학원을 세 군데 보내려면 학원비만 해도 얼마인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족히 50만 원은 들 것 같았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친구 따라 학원에 갈 법도 하건만 그동안 아이는 한 번도 학원에 가고 싶다고 한 적이 없었다. 남편이 아이 등, 하원을 책임지는 덕분에 학원이 필수가 아닌 선택적 옵션이 되면서 현재 사교육비는 단돈 100원도 지출되지 않고 있다. 빠듯한 살림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우리 부부가 조금 더 교육적 마인드를 갖추고, 조금 더 부지런하다면, 해서 아이가 집에서 머무르는 시간을 다양하고 풍성하게 채워줄 수 있다면 학원에 대한 고민은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사랑 말고도 연령에 맞는 다양한 경험과 체험이 아이의 성장에 필요하므로 아이를 학원에 보내면 좋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도 미술의 세계가 얼마나 다채로운지 알려주고 싶다는 엄마의 마음을 오랜 대화 끝에 아이에게 전달되었나 보다. 일단 한 번 가본 후, 더 다닐지 말지 아이 스스로 판단하기로 했다.


학원에 처음 가는 길, 손을 붙잡은 아이가 말했다.

- 엄마, 나 떨리고 긴장돼.

- 엄마도 떨려. 미술은 잘하고 못 하고 그런 게 없어. 그러니 재미있는 시간 보내고 와. 새로운 친구도 만나보고. 그러면 돼. 그리고 더 하고 싶지 않으면 엄마한테 말해줘.

50분의 수업을 마치자 선생님께서는 아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아 보내주셨고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아이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잠시 뒤에 곁에 다가온 아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 엄마, 나 계속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내일도 오고 싶어.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은 아이가 하나의 작은 성공을 경험한 것이다. 떨리고 긴장되었던 감정들이 기쁘고 뿌듯한 마음으로 치환되는 순간의 환희를 아이도 느끼지 않았을까?


첫 경험은 서투르기 마련이다. 서투름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우리는 종종 시작도 하기 전에 뒷걸음질로 달아날 궁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서투름도 쌓이다 보면 밑거름이 되는 날이 온다고 믿는다. 아이의 수업을 기다리는 50분은 조금 지루했지만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를 안아주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시간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사교육의 세계에 발바닥을 담갔다. 그 세계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는 것은 부모로서 풀어내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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